내 몸의 힐링이 필요할 때
크라프트지와 함께한 감성 실천의 기록
‘종이’라는 소재의 가치가 기후위기의 시대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제목부터 이렇게 거창해야 했을까.
사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종이라는 소재가 지구 환경에 끼치는 부담은, 다른 소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양한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알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종이를 중심으로 작업할 수 있었고, 그 자체로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더불어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제품 포장이나 재료 자체를 종이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변화 또한 반가운 마음이다.
나는 30년 전부터 크라프트지끈이라는 소재로, 마루직기에서 직물로 짜는 작업을 하면서, 나름 꽤 괜찮은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육아를 위해 작업을 중단하고,
그 꿈을 미루고 살게 되었는데, 일명 '경단녀'에 등단하는 순간이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변명으로, 작업을 유지하지 못한 사연도 기록으로 남긴다)
이 재료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고, 수업을 진행하며, ‘환경실천종이프로젝트팀’과 같은 연대도 꿈꾸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든, 시작하는 순간 쓰레기가 발생하고, 그 쓰레기를 바라보는 마음 또한,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꿈은 조용히 접어두었다.
다시 꿈하나를 잠시 미루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무엇보다 크라프트지끈으로 만든 작업물의 내구성과 효용성, 즉 , 작품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오래 견디고, 어떻게 쓰이는지를 스스로 실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어떤 점이 좋고 불편한지를 직접 보고, 듣고, 오래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물의 반응은 생각보다 든든한 응원이었다. 2020년, 친한 벗이 아끼는 고양이 '용군'을 위해 "숨터(고양이용 안식처)"를 선물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으며, 장소를 옮겨가며도 변형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소식은 내 작업에 대한 확신을 더욱 깊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예쁜 용군이 지난 7월 28일에 무지개다리를 건너 별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용군아. 그곳에서 더 행복하렴. 숨터, 애용해 줘서 고마워. 네가 얼마나 자주 그곳에서 놀았는지 알아.
아빠가 자랑하며 올려준 사진을 봤거든. 너무 기뻤어. 다시 한번 또 고마워.
내가 짜 준 숨터에서 편안했길 바라.
2022년에도 지인의 고양이 ‘담이’를 위한 러그를 선물했는데, “지금까지도 너무 잘 쓰고 있고, 디자인이 워낙 감성적이라 어디에 두어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최고!”라는 인사와 사진을, SNS 뉴스피드에 올려 주셨다.
그 한마디가, 선물한 마음을 오래도록 기쁘게 했고 보람이라는 선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로써 반려묘를 위한 소품으로도 4~5년은 거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색이 예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염색사, 두 가지 단 점을 체크하며.
물론 성공 사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염색된 크라프트지끈의 경우, 염료가 손과 옷에 묻어 나오거나, 햇빛에 노출이 많이 되면 색날림 현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아주 간혹, 풀을 바르는 작업을 하던 중 염료가 번져 나와 손을 물들이거나 옷을 망치는 일이 더러 있었다.
수요자가 다양한 색상을 요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염색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환경적 가치와 실용성을 생각해서 나는, 주로 크라프트지끈 원사만 사용한다.
그리고 색이 필요할 땐, 가끔 직접 염색해서 작업하기도 하는데, 염료는 한여름 숲에 널린 환삼덩굴, 가정에서 나오는 양파껍질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종이의 가치를 묻는다면, 나는 이 말을 꺼내고 싶다.
“잘 찢어지고, 잘 구겨지고, 잘 버려지는 종이가 비틀려 꼬임을 갖는 순간, 가위가 아닌 니퍼로 끊어야 할 만큼 강해진다.”
포장끈, 휴지심, 택배박스, 밀가루 포대, 심지어 골판지 가구까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종이 제품들 중 상당수가 크라프트지다.
대부분 약한 종이로 알고 있지만 노끈으로 변신하면 이 종이의 힘은 그야말로 "Kraft", '힘'이 된다.
그래서 종이는, 그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생활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나는 이 ‘힘’을 믿고, 우리 집 생활 소품을 하나씩, 크라프트지, 종이라탄으로 바꾸어 보기로 했다.
침대 러그, 침대 사이드 등, 고양이 러그, 티코스터, 현관 러그, 티슈박스, 화분가리개, 팬트리 가리개, 채소바구니 등.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집 안의 공기마저 감성적으로 바뀌었고, 집에 들어선 지인들은 인사보다 먼저 카메라부터 꺼내기 바빴다.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종이라탄 러그.
신발을 벗고 맨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양말을 더럽히지 않아 좋다는 가족들의 말처럼 이 장소는 어느새 가장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다.
딸아이는 제 방에 깔린 러그를 맨발로 밟으며, 고양이처럼 ‘꾹꾹이’를 하며 말했다.
“맨발로 밟으면 까슬까슬한 종이 느낌이 너무 좋아. 발이 깨어나는 기분이야.”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종이라는 소재가 가진 감각이, 아이의 발끝에, 몸의 감성에 그렇게 와닿았다는 사실이.
우리는 종이를 주로 손으로 만진다. 쓰고, 접고, 자르고, 포장하고. 하지만 발로 느끼는 종이, 그건 전혀 다른 경험이다.
손으로 느끼는 촉각은, 노인에게는 기억회로의 자극, 아이들에게는 소근육발달과 인지능력을 향상한다는 연구결과를 통해 종이공예의 장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로 느끼는 감각,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발로 느끼는 감각, 그건 단순한 촉각이 아니다. 몸 전체의 긴장을 풀고, 땅과 연결된 ‘존재의 실감’을 느끼게 해 준다.
손끝은 사물의 경계를 구분하지만,
발바닥은 세상의 온도를 기억한다.
종이러그를 밟을 때 느껴지는 감촉은 부드러운 흙 위를 걷는 듯한, 봄날 숲에 오르는 파릇파릇한 잔디를 밟는 듯한, 지구의 심장박동 같은 것이다.
발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 몸을 지탱하는 감각기관이다. 그 발로 종이라탄 러그를 디디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안도와 위로를 받는다.
그건 어쩌면, 종이로 짜인 ‘땅의 기억’ 일지도 모른다.
나무에서 온 종이는 차갑지 않고, 숨을 쉬며, 실내 습도를 자연스럽게 조절해 주는 고마운 소재.
단단하지 않지만 의외로 견고하고, 질감은 거칠지만 거기서 오는 자극은 오히려 부드럽고 편안하다.
딸아이의 발이 기억하는 그 감촉은, 아마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나무라는, 숲이라는 '자연의 온도'였을 것이다.
버릴 때도 부담 없고, 땅에 묻어도 6개월 이내 생분해된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나는 늘 생각한다.
누군가 내 작품을 손에 쥐었을 때,
후회 없는 선택이 되기를.
작품이 실험적인 소재로 만들어졌더라도, 일상에서 충분히 감당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실천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봐 주는 분들께 종이의 가치가 제대로 전해지면 좋겠다.
어쩌면 종이는,
지구가 인류에게 미리 보내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나무에서 펄프를 추출해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를 강한 힘으로 꼬아, 실용의 세계로 다시 보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지구가 전하려 한 어떤 메시지를 상상했다.
나무에서 온 종이를 비틀고 꼬아 만든 작은 그릇. 소꿉 같은 종이라탄화분을 짜고, 그 종이화분에 리톱스 다육을 옮겨 심었다.
흙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작은 종이 화분 안에서, 생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건강하게 자랐고, 생명을 잘 지켜낸 종이는 조용히, 흙과 함께 큰 화분으로의 이사를 준비를 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요구되는 소비의 방향은 명확하다.
자연에 부담을 덜 주는 소재를 선택하고, 가능한 한 순환 가능한 구조로 돌아가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
화려한 외장재보다는 분리배출이 쉬운 단일소재 포장,
긴 수명을 자랑하기보다 생분해성 자원으로 설계된 제품이 오늘날 더 실효성 있는 선택일 수 있다.
특히 종이는 6개월 이내 생분해 가능하며, 펄프화 과정을 통한 재활용률이 비교적 높고, 자연 순환 속에서 부담을 최소화하는 소재로 평가된다.
이왕이면 종이로 제작된 제품을 선택하고, 그러한 기업의 노력을 응원하는 소비로 이어지는 것.
거창한 실천은 아닐지라도, 그런 선택 하나가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을 앞당기는 작은 기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구가 미리 건넨 선물’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방식이 아닐까.
어쩌면,
‘지구에서 온 내일’이라는 메시지는
단순히 종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종이를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다시 기억하고,
지구의 미래를 스스로 고민해 보라는
조용한 초대장일지도.
그리고 지금이라도
《매주 수요일 연재:종이, 지구에서 온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