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사람으로 오다

2021.09.19

by 종이소리

《저선생(楮先生),

종이가 사람으로 오다》

― 한유(韓愈)의 모영전에서

시작된 ‘종이의 인격’


1. 한유의 ‘모영전(毛潁傳)’이란 무엇인가?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는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글 자체가 하나의 철학’이라 불릴 만큼

서사적 상상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가 쓴 〈모영전(毛潁傳)〉은

일종의 풍자 소설,

우화적 전기(傳記) 형식으로,

붓·먹·종이·벼루 같은

문방사우를 인물로 창조해

서로 대화하고,

이야기를 주고받게 하는

‘의인화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모영전의 주인공은

모영(毛潁)이라는 ‘붓’이다.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선비처럼

성품과 신분, 재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고,

한유는 그 붓의 주인공을 통해

당대 문단의 평가, 권력,

인간의 오만과 무능,

학문적 이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 안에는 모영과 교류하는

문방사우’들이

하나의 사회처럼 존재한다.

먹은 먹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성품과 역할이 있고,

그들의 갈등과 연대,

자존심이 뒤섞인 이야기가

품위있게 전개된다.


즉, 모영전은

단순히 도구의 기록이 아니라,

문방의 세계 자체를 하나의

‘사회·우주’처럼 그린 작품이다.


2. 저선생(楮先生)은 누구인가?

모영전에 등장하는 ‘종이’는

저선생(楮先生) 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저(楮)는 닥나무, 즉 종이의 원료.

저선생은,

그 닥나무 종이를 뜻한다.


이름부터 이미 인격을 갖춘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

‘저(楮)’: 닥나무

‘선생(先生)’: 글을 가르치는 스승, 학문적 어른


즉, 저선생은 단순한 종이를 넘어

학문의 스승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한유는 종이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종이가 학문의 기초이자

사유의 토대임을 드러낸다.


학문은 종이 위에 남는다.

종이가 없으면 글도,

문장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 저선생은

배움을 기록하는 스승이다.”


이 발상 자체가 이미 놀라운 감성이다.


저선생의 고향 — 회계(會稽)



저선생은

'회계저선생(會稽楮先生)'이라

불리는데, 여기서 '회계(會稽)'는

중국 절강성 지역으로

예로부터 닥나무와

종이 생산지로 유명하다.


회계의 현재 이름은 사오싱(绍兴),

중국의 베네치아로 유명하며,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인

'루쉰' 태어난 곳이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수도였던

회계의 닥나무로 만든 종이는

질이 곱고 단단해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한유의 시선에서 보면

“종이계의 명문가”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저선생은

회계 지방에서 태어난,

훌륭한 가문 출신의 선생님

으로 모셔야 할 존재이다.



왜 한유는 종이를

‘사람’으로 만들었나?


당시 문인 사회에서는

학문과 글쓰기의 도구가

‘신적’ 존재처럼 여겨졌다.


'먹을 갈고 붓을 쥔다'


이 행위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의식을 치르는 행위였다.


한유는 이를 뒤집어

문방사우를 아예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품성,

출신, 자존심을 가진

존재들로 등장한다.


■모영(붓)은

선비처럼 직언을 하고

세상을 비판하고,

■연노(벼루)는

묵직하고 인내심 깊은 성격,

■묵(먹)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운 성정,

■그리고 종이,

저선생(楮先生) 은

학문을 기록하는

선비 중의 선비.


이런 세계관에서 종이는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글의 운명을 받아 적는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저선생의 품성

— 부드러움과 강직함


모영전 속에서 저선생은

‘온화하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는’

이중적 성품을 지닌 인물로 나온다.


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1) 모든 사유와

기록을 담아내는 관대함


그릇처럼 넓고 부드럽다.

누구의 글도 받아들인다.

고운 필획, 거친 필획,

실수조차 비워두고 감싸준다.


2) 그러나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


닥나무 섬유의 구조처럼

그는 강하다.


잘 찢어지지 않고 오래 버틴다.

글은 종이의 강직함을 발판으로

때때로 숨고, 때로는 드러내며

살아 남는다.


이 품성들은

현대의 ‘종이 예술’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강렬한 은유가 된다.


종이는 가장 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장 질긴

생명력이 숨어 있다.


내가 종이를 닮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이다.


그래서 지승으로 꼬은

노끈을 앞에 모셔 놓고

이 귀한 저선생을 비벼 꼬은 실로

베를 짰으니

큰 절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육중한 몸을 굽히고, 낮추고,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삼가 비옵니다, 저선생님,

때가 되어 마무리 잘하도록

이 끈기를 잡아 주시기를"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