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5년 후>
넌 내 인생의 여자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란 영화에서 마이클이 줄리안에게 말하는 대사다.
결혼을 앞둔 마이클과, 오랜 친구인 그를 좋아해서 식을 망칠 계획으로 찾아온 줄리안이, 함께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처음엔 이 씬의 문장이 참 좋았다가, 나중엔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그 중간의 어디 즈음에 오래 남아있다. 내가 줄리안의 입장이면 고맙고 따뜻할텐데 또 반대의 입장이라면 무너지고 아플 것 같아서 말이다.
사랑하는 이의 '인생의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건 모든 사랑의 종착이니까.
아무튼 그 장면을 보고 인생에 남을 누군가가 꼭 반려자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게 반려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배신의 의미,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어서 그렇게 서로의 추억 어딘가에 오래 남을 수도 있겠다고.
조금 이기적인 마음을 섞자면 그래, 어찌되었든 인생의 사람. 곁에 있지 못할 거라면 네 인생의 기억에 오래 각인돼 남을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 애가 있었어.' 하고 추억 속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나도 언젠가 꼭 그런 같은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프에게도 카티야가 그랬을까. 45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죄책감과 얕은 애정, 젊고 자유로웠던 날에 대한 추억과 씁쓸함. 갈망, 회한 같은 것들이 남아 모두 뒤섞여 버린 거라고.
그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제프에게 그녀를 더 '인생의 사람'으로 남게 만들고, 한밤중에 다락방에 올라가 카티야의 사진을 찾아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곁에서 지켜보는 케이트에겐 배신감과 혼란함, 아픔, 애증으로 다가왔을테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그래서, 이제와서, 함께 노년을 걸어가는 둘에게 감히 이 인생이 틀린 것이라고, 잘못된 선택이라고, 그저 원래 계획이 틀어져 버려서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인연이 이어진 사고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프는 당신을 잡은 것이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선택이었어 라고 말하지만, 케이트는 결국 복잡한 표정으로 울어버리고 만다.
운명인 줄 알았던 사람과 사랑이, 함께한 인생과 삶이. 나를 선택한 그 모든 것이 그저 그의 '차선'처럼 느껴질때의 허망함이란.
어렵다. 인생은 정말 마지막까지도 정답이었는지 아닌지 모르는 걸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둘의 마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몇 십년을 살아내 겪어와도, 인생은 왜 여전히 어렵고, 아프고, 막막하기만 한 건지.
세상에 아주 많은 만남과 인연이 있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이 영원한 함께함을 의미하진 않음을, 인생의 유일한 어떤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란 것을 나는 아주 잘 안다.
그럼에도 항상 터무니 없는 기대를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 또 속으며 믿고 살아가는 존재가 결국 인간이라서, 조금 씁쓸하고 막막하고, 함께 슬퍼졌다.
신뢰와 불안. 결국은 나의 마음의 문제.
후반부의 영사기 씬은 정말 숨을 삼키며 봤다. 그 조용한 고요가 그렇게 충격적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둘의 대화와 작은 소리들 만으로 온전히 꽉 채우는 95분이 지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시선을 옮기지 못했는지도.
"내가 보기에 늙어가면서 가장 나쁜건 그 목적의식을 잃는단거야."
"넬슨 제독은 살해됐죠?"
"그래도 우승했죠. 그만하면 축하받을만한 일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