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즈음에 -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 난생처음 운동에 꽤 깊게 빠졌었다. 두 달간 매일 달리기를 5km 이상 했는데 도착지점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다 보니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약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운동 대부분을 무서워하는데 어쩐지 설렁설렁 자전거 타는 것에는 꽤 재미를 느껴서 점점 속도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약 2주 정도는 진지하게 취미로 사이클을 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넘어지면 손을 크게 다칠 위험이 있어서 마음을 접었다. 어쨌든 그 선선한 즐거움만큼은 포기하지 못해서 설렁설렁 타는 자전거는 틈나면 혹은 틈을 만들어 타고 다녔다. 자전거 타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즐긴 적 없이 평생을 살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긴, 평생을 꼼꼼히 계획하며 살았어도 돌이켜보면 정작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들 거의 대부분은 '운'에 의해서 일어난 걸 보면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오늘 아침 한강변을 달린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소회를 적는다.
자전거 안장에 앉기 전 꼭 통기타 연주곡을 틀어놓는데 손가락으로 기타 현을 튕길 때 울리는 나무 소리가 마치 자전거의 휘파람 소리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끈적한 시카고 재즈도, 찰현악기의 마찰 소리도, 내가 좋아하는 티보데의 라벨도 어쩐지 자전거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강가의 바람을 마주하면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벅참을 느끼게 된다. 강물에 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볼 때마다, 또 서울의 야경을 그려내는 밤의 강가를 만끽하면 어쩐지 엄청난 부자가 된 것만 같다. 그리고 이 특별한 감정은 자전거를 반복해서 타더라도 희석되거나 익숙해지지 않아 정말 이상하다. 로스팅이 잘 된 훌륭한 원두커피를 마실 때, 베르그의 소나타를 들을 때 가슴 끝에서 찡하게 울려오는 만족감이 있더라도 경험이 반복되면 결국 그런 찰나의 반짝임은 빛을 잃게 되고 어느 정도의 흡족함을 느끼더라도 매번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는 도저히 없는데도 말이다.
페달을 밟는 순간부터 도착지점까지 그 행위를 지속하지 않으면 자전거는 쓰러지고 만다. 내 의지에 따라 쉼이 허락되지 않기에 전진하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계속 발을 굴려야 한다. 자전거를 탈 때 쓰는 근육은 크기가 커서 잠깐을 달렸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한 순간이 잠깐이라도 있었다면 늘 어느 정도의 근육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매번 썩 반갑다. 아마 하루키의 말마따나 ‘어려운 일을 자진하여 행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달을 박차는 순간만큼은 힘차게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이 들며 잃은 줄 알았던 기운과 선명함이 실은 내 속에도 어느 정도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증거를 만난 순간만큼은 그래, 야 어쨌든 박차고 나가자. 어쩔 수 없잖아? 하게 된다. 굳이 표현하면 이것은 천진한 행복인 것 같다.
초목을 무성하게 한 푸른 여름을 지나 어느덧 9월이 왔다. 곧 경복궁 옆 은행나무 가로수가 여느 때보다 완연해질 것이다. 허락한 적도 없는데 시간은 어쩐지 너무 착실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꽤 자주, 나는 시간이 하염없어 서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를테면 뜬금없는 소나기나 조수 간만의 차처럼. 이제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처연하게 바라보고 싶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풍경 아래 지난 인연을 서글프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도 때때로 자전거를 타며 내 마음에 시원한 낮잠을 선사하고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