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보는지.(427쪽)
# 우아한 고슴도치들
여덟 가구가 전부인 고급 아파트 수위로 편견에 기꺼이 부응하는 쉰네 살의 르네. 텔레비전을 호위병으로 세워두고 수위실의 은밀한 아지트에서 영화 "베네치아의 죽음"에 흥분하고, 말러의 교향곡
을 들으며, 역사,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정신분석학, 문학과 예술에 빠져든다. 자신의 이중생활이 들킬세라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지만 지성의 속살을 키우며 제법 행복하게 살아간다. 입주민의 딸인 열두 살의 팔로마.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아버릴 만큼 조숙하다. 덧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죽을 계획을 세우는 발칙한 소녀. 팔로마도 르네처
럼 자신의 정체를 들킬세라 가시를 세우고 있다. 화자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두 고슴도치들의 이야기
는 꽤 흥미롭다.
# 팔로마
팔로마에게 "네 꿈은 뭐니?"라고 물었다가는 큰일 난다. '"인생은 의미가 있어. 위대한 사람들을 봐."
(24쪽)' 인생을 달관한 척 교훈을 늘어놓는 어른들
도 큰코다친다. 그녀는 어른들이 인생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사실을 감춘 채 자식들을 속인다고 믿고 있다. 진실에 무감각해지며 어항 속 빨간 금붕어 신
세로 살아가면서 모범이 되려는 어른들의 세상을 너무나 빨리 알아버린 아이. 실존 자체가 부조리라 여기는 팔로마는 성공했지만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아빠도, 식물에 직찹하는 엄마도, 결벽증이 있는 언니도 싫다. 고급아파트에서 허세로 가득한 어른들의 삶은 온통 불만 투성이다. '살기, 죽기. 그것은 자기가 건설해 나간 것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 건설하는 것이다(157쪽)'
어항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팔로마. '몇 살에 죽느냐보다 죽는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29쪽)'에 의미를 둘 만큼 당차다.
# 르네
'내가 수위 같지 않은 수위로서 수위의 배신자라면 마뉘엘라는 포르투갈 출신 가정부의 배신자다.(37쪽)' 마뉘엘라는 우아한 가정부이자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다 아는 르네의 유일한 친구다. 수위실
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구워온 쿠키를 먹으며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외양과 신분만으로 지적 수준을 평가하는 세상에 허를 찌르는 존재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일찍 중단했고, 정서적 허기를 책으로 채웠던 르네. 비록 존재감 없는 수위일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지적 탐구의 한계는 없다. 폭넓은 교양 생활 덕분에 가뿐히 지식인들을 앞서게 된 르네. 자급자족이 안되면서 도 언어로서 우위를 점하며 살아가는 지식인을 비웃는다.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착한 수위처럼 약간 흐리멍덩한 눈(112쪽)'으로 변신하 면서도 고양이 이름을 카레(안나 카레니나)와 레옹(레옹 톨스토이)으로 짓는 허술함도 장착.
# 다도 그리고 영화
'사소한 것에서 위대함을 보는 마음이, 능력이 생긴다.... 다도, 같은 동작과 시음의 정확한 제반복... 다도는 부조리한 우리 인생에 고요하고 조화로운 틈을 만드는 미덕이 있다. 그렇다. 세상은 공허함과 결탁하고, 길 잃은 영혼은 아름다움에 눈물짓고, 무의미함이 우릴 둘러싼다. 자, 차를 마시자. 침묵이 퍼지고, 밖에서는 흔들리는 바람 소리가 들리며, 가을 잎들은 소리 내며 날아가고, 고양이는 따스한 빛 속에 잠이 든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은 승화한다(124쪽)' 통속적인 계급 간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다도 장면
이 많다. 차를 마시며 삶을 논하고, 상처받은 영혼
들은 마음을 치유한다. 베네치아의 죽음, 붉은 시월, 야스지로 오즈의 영화들( 무네카타 자매들, 오차즈케의 맛, 도쿄가 ), 블랙 레인, 블레이드 러너 등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사람
'미셸 부인은 흠, 뭐랄까, 그래, 지성이 살아 있다. 그런데 평범한 수위처럼 행동하기 위해, 일부러 아둔해 보이려고 스스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미셸 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덮여 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처럼.(200쪽)' 두 눈 뜨고도 못 보는 어른들과 달리 열두 살의 팔로마는 르네의 지성미를 간파한다. 확신 너머를 보지 못하고 타인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볼 뿐인 세상에서 팔로마는 르네 부인처럼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문학 없는 문학 수업도 언어의 지성 없는 문법 수업(217쪽)'도 허위로 가득한 세상도 너무 지겹다.
# 자작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는 내 말에 찬성이나 반대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넌 누구니? 나랑 말하고 싶니? 너랑 함께 있어 정말 기쁘다"하고 말하는 듯 나를 바라본다. 예절이란 이런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태도. (234쪽)' 새로 이사 온 일본인 가쿠로 오즈는 유연하고 살랑살랑 소리를 내는 자작나무 같은 사람이다. 겸손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팔로마를 대한다.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죠."."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죠."(186쪽)' 르네가 시작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완성하는 가쿠로. 가쿠로가 묘한 눈길을 보낼 때 둘 사이를 쓱 지나가는 레옹. 고양이 레옹에게 안나 카레니나를 선물하는 가쿠로는 센스만점. 르네가 엉겁결에 감사의 답장을 써놓고 정체를 들킬세라 당황하는 부분은 폭소를 자아낸다.
# 오브제들의 연대
지성미 가득한 르네는 열렬한 정물화 애호가다.
가쿠로의 식사초대에 응하며 르네는 현관에 걸려
있는 피터르 클래스의 정물화에 매료된다. 그림 속
의 정물들 간의 연대와 자기장으로 인한 긴장과 균형. '특별한 형상을 통해 인간 정서의 보편성을 구현함으로써 영원성이라는 특성(283쪽)'을 드러내는 예술 작품은 매혹적이다. '인간의 탐욕적 시간을 벗어난 무시간성.(284쪽)' 둘 사이의 대화소재는 무궁무진하고 가쿠로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안정감으로 르네는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당신에게는 취향이 있고, 혜안과 통찰력이, 감각이 있어요."(317쪽)' 르네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가쿠로. 팔로마도 르네와 가쿠로의 친구가 되어 어른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며 삶에 대한 의지를 만들어 간다. 정물화
속의 오브제들처럼 그들은 '서로 연대하며 서로를 밀고 당기는 자기장(281쪽)'안에 있다. 긴장과 균형 속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발산하게 하는 관계.
사회적 기준과 편견 때문에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세상.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교육체계와 허세로 가득한 부자들에 대한 비판은 낯 뜨겁다. 54살과 12살이 영혼의 친구가 되어 서로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이야기. 가시를 세우고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던 고슴도치들이 진정한 연대와 소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따뜻하다. 철학적 사색은 심오하고, '생의 움직임 속에 영원을 응시하는 (137쪽)' 예술의 이야기는 우아하다. 삐딱하면 서도 경쾌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급반전되는 결말은 놀랍다. 위트에 낄낄대다 진실한 소통에 먹먹해지는 이야기,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다.
가쿠로 씨가 어렸을 때 누군가가 내가 지금 요코를 바라보는 것처럼 기쁨과 호기심으로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날개에 어떤 무늬가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매우 아름다울 거라 믿으면서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우주 안에, 만일 아직 되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난 그걸 잡을 수 있을까? 부모님들의 정원과는 다른 정원을 내 인생에서 만들 수 있을까?(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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