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보다는 기술

「낭만적 연애와 그 이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by 라벤더

# 준비된, 준비 없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쓸 도구들을 장만한다. 신혼여행과 결혼식을 준비하고 청첩장을 돌린다. 그리고 정신없이 결혼식을 치른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 속에 뭔가가 빠져있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다양한 상황을 무방비의 상태로 맞닥뜨린다.


결혼한 지 16년 만에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라비의 고백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라비와 커스틴의 만남, 사랑, 결혼 이야기는 우리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 너를 이해해 가는 과정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낭만적 연애의 과정을 진솔하게 다루었다면, <낭만적 연애와 그 이후의 일상>은 결혼 이후의 일상을 깊이 있게 다룬다. 사랑과 결혼 안에 사유를 묶어두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상대를 이해해 가는 과정,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성찰의 기록이다. 소설과 에세이가 버무려져, 재미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성찰은 묵직하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35쪽)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이들의 환상을 깨뜨리는 말은 아닐까. 그러나 결혼을 경험한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며 녹녹지 않은 감정의 파도를 경험해야 하는 과정들. 낭만적 연애의 감정은 그 이후의 일상을 버텨내라는 마취제 같다. 아쉽게도 마취는 쉬이 풀리지만, 일상을 견디며 굳은살이 생기고 조금은 의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나야말로 결혼 삼십 년 만에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



# 친밀한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

친밀한 관계에서만 감정의 바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알랭 드 보통의 통찰은 놀랍다. 진상짓을 부려도 부끄럽지 않을 부부,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좋을 부모. 예의를 차리고 감정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회생활을 생각하면 그의 통찰에 끄덕이게 된다. 연년생 동생 때문에 일찍 철이 들어버린 , 뒤늦게 투정을 부리던 첫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착하고 바른 아이로 키우고 있다며 자신만만했던 내가 부끄럽다.



효와 예의라는 긴장으로 경직된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 부드러워 보이는 그 관계가 진정 부드러운 것인지. 감정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불안정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겨워 보인다. 상대를 진실로 믿는 그 과정을 뚫고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미미할지라도, 우리는 바보스러운 그 과정을 기꺼이 선택한다.



# 감정의 출발점으로 간다는 것

표면적인 것들로 충돌하는 문제들. 알랭 드 보통은 감정의 출발점으로 가보라고 권한다. 라비와 커스틴이 충돌하는 많은 문제는 기실 어릴 적 이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립의 순간마다 불안을 느끼는 라비와 회피하는 커스틴. 감정의 결과는 어릴 적 작동했던 무의식의 감정이 조종한다. 전쟁 중에 불안을 경험했던 라비는 흐트러짐과 불안정을 견딜 수 없다.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랑했던 아버지, 그 충격을 잊고 싶었던 커스틴은 낙서를 반복한다. 생생한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선 하루도 살 수 없기에, 생존의 방법으로 감정을 마비시킨다. 어른으로서 보여주는 감정들은 어찌 보면 표면적 일지 모르겠다. 감정의 출발점으로 간다는 것은 어렵지만 필요한 과정이 아닐지.



삼십여 년 동안 수없이 충돌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왜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로 고민했던 순간들. 라비와 커스틴처럼 감정의 시발점을 따라갈 수 있었다면, 시간을 거슬러 상처받아 아파했던 어린 라비와 커스틴을 바라볼 눈이 있었다면, 감정의 격동을 조금은 더 유연하게 대처하지 않았을까. 연민과 후회는 이렇게도 뒤늦게 찾아온다.



# 사랑은 열정이기보다 기술이다

우연적인 만남을 엄청난 확률로 포장하며 사랑하는 이를 이상화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주인공. 사랑의 시작은 뜨거운 온도를 기꺼이 견디게 한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열정의 온도를 낮춘다. 사랑했던 이유들이 싫어지는 이유가 되고 배신의 상처는 무겁기만 하다. 배신한 이에게 죽음으로 복수하겠다며 비타민씨를 털어 넣은 주인공에게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려는 마음이 이해된다. 살아야겠기에 공유했던 공간과 경험들을 자신만의 경험으로 치환하며 사랑하던 존재를 잊어간다. 망각은 삶에 꼭 필요한 감각인지도 모른다.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17쪽)


불가해한 영역은 그대로 놔두더라도 이해 가능한 영역만이라도 기술을 통해 이해하려는 것. 사랑은 어찌 보면 시작이라기보다 과정을 통한 성숙이 아닌가 싶다. 결혼을 오래 경험한 이들에게도 좋을 이야기고 , 낭만적 사랑을 앞둔 이에게 예방주사 같은 책이다. 공감과 배려의 출발점으로 데려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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