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풍성한 삶이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by 라벤더

작은 아이가 영화를 좋아한다. 아들바보인 내가 봐도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손이 제법 맵다. 인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많을 열여덟 살. 방학을 맞아 계획이 많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만들고 싶어요." 아이는 그렇게 살고 싶단다. 그 뭔가는 아마도 영상물일 텐데,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엄마 인생이 뭘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흔일곱 인 나도 아직 답을 몰라 헤매고 있는 중인데...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하니?" 난감할 때 잘 쓰는 수법, 되질문하기.



"오늘은 데미안을 읽었어요. 얇은 책이어서 두어 시간 만에 읽을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책이어서 다섯 시간 동안 읽었어요.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궁금했던 질문에 대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다른 책은 한번 읽고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 이 책은 두고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일단은 내 안의 나를 깨고 나오려는 노력을 해야겠죠. 영상을 매끄럽게 만드는 기술이라는 장점에 비해, 제 안에 콘텐츠가 많이 부족해요. 이번 방학에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나를 채우려고요."



제 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실을 그린다"는 말을 듣지만, 저 자신은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223쪽)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처음 만났다. 낯설었다. 큰 화면으로 잔잔한 TV드라마를 보는 느낌.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고 대화하고, 우리네 일상과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말을 걸어온다. 너라면 어떻겠냐고, 그냥 그렇게 사는 거 아니겠냐고. 변화무쌍한 장면하나 없이 마음이 요동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며칠 동안 영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책에서 감독도 말한다. '"어떻게 하면 보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될까"(134쪽)'



감독의 모든 영화가 궁금했다. 아니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만든 영화들을 두서없이 찾아보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자서전을 읽으며 이십여 년 동안 TV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영화감독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야기와 더불어 인생이야기를 읽는 맛이 쏠쏠하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은 이 장면을 어떤 의도로 만들었을까, 상상하기 마련인데, 내가 본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더 흥미로웠다. 영화를 찍을 때 모든 판단과 비판을 배제하고 각각의 인생을 진솔하게 그리려고 했다는 말은 다큐멘터리 감독답다.



다큐를 볼 때 저게 사실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조금은 극적 연출이 있다고 감독은 솔직히 고백한다. 그것 때문에 부침을 겪었고, 성장했으며 결국 자기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만들려고 했다. 사회고발 현장에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달려가고, 기계와 필기가 방해가 된다면 그 조차도 배제한 채 농밀한 취재의 시간을 가진다. 책을 쓰기 위해 1년 여의 시간을 취재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경험은 인생을 품어내는 영화가 된다.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 애도는 비통하고 괴롭기만 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이 성장하기도 한다.(87쪽)


그가 표현하는 상실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아끼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떠나버리면, 우리는 슬픔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계속된다. 숨도 못 쉴 것 같지만 또 살아온 것처럼 살아간다. 슬퍼하다가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대화를 하고 웃는다. 죽음은 삶 속에 내재되어 있고, 삶과 죽음이 인생의 한 조각일 뿐이며, 상실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는 것. 감독이 지향하는 작품과 인생의 방향이 아닐까.



행복하려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내게 내내 질문한다.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아키와 2001년 옴진리교에 대한 대담이 인상 깊었다.

고레에다: 저는 사실 그다지 의미라는 형태로 삶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이면에서 의미 있는 죽음,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사고방식이 나올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노다: 의미를 묻기 전에 기분 좋게 살았다는 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주위의 자연과 접하며 생기 넘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사는 의미를 말해야 하죠. 태어났을 때부터 무언가를 위해-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살면, 사춘기가 되어 사는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곧장 그 생각이 뒤집혀 훌륭하게 죽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주오코론, 2001년 11월 호, 책에서 재인용)(169쪽)'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172쪽)' 영화로 먹고살 수 있을지 내내 걱정만 하다 돌아가신 고레에다 감독의 어머니. 칸 영화제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떠나셨단다. '인생은 조금씩 어긋난다'라는 <걸어도 걸어도>의 문구는 그래서 나왔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웃을 수 있는 건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단다. 그래서 죽음의 슬픔보다 풍성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구나. 그의 마음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니 눈물이 난다.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190쪽), 흰색과 검은색이 아니라 회색 그러데이션으로 영웅도 악당도 없는 상대적 가치관의 세계를 그려내려 한 것(190쪽),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엄마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배제한다. 영화를 보며 모성애와 가족에 대한 내 안의 질문은 끝도 없었다. 영화가 일상으로 밀려들어와 말을 걸고,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변화를 시도하는 것, 작가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71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도 곧 봐야겠다.



가슴속 슬픔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씩씩함이자 아름다움 아닐까요. 그 슬픔을 받아 주는 쪽이 될 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은
제게도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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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7월 31일 새벽에 쓴 글이다.

교직생활 중 일 년이라는 무급휴가를 하게 되었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잘만큼 자고 혼자서 출근한 남편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읽을 책들과 노트북을 들고 근처 카페에 갔다. 10시부터 4시까지 출근하는 진상고객이었을 듯, 그래도 중간에 새 메뉴를 시켰으니 덜 그랬으려나. 지금 샘각하니 참 눈치가 없었네:)



선물처럼 받은 일 년이 휘발되는 거 같아 읽고 쓰고 흔적을 남겼다.



5년 뒤 퇴직을 하고 7년 뒤 책방지기가 되었다. 과거의 나는 이런 글을 썼구나, 하고 만나는 시간이 꽤 즐겁다.



꿈 많은 두 아들의 근황, 큰 아들은 게임을 좋아하더니 AI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 휴학해서 나초라는 냥이랑 안식년을 보내고 있고, 데미안을 읽던 둘째는 연기를 전공하려고 도전 중이다. 현역복무를 마치고 뒤늦게 꿈을 찾아가는 아이들에게 무한 응원을 보낸다. 어떤 삶을 살던 책과 함께하는 풍성한 삶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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