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한강」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밀란 쿤데라, "농담"중에서)
노희경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정아는 독선적인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왔다. 자신의 첫아이를 뱃속에서 잃을 때도 남편은 무심했다. 그 아픔을 만든 남편에 대한 분노를 가슴 밑바닥에 눌러놓은 채 현실에 순응했다. 쿤데라의 말처럼 남편에 대한 증오가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었기에 살아냈는지도 모르겠다. 정아에게 둘도 없는 친구 화자. 그녀는 지금 기억을 잃어간다. 치매는 오래된 기억과의 조우를 위해 만든 병일까? 그녀는 무의식에 눌러놓았던 첫아이에 대한 기억 속에 있다. 열감기로 손써 볼 도리도 없이 죽은 아이를 업고 숲길을 걸었을 그 적막함. 첫아이 대신 베개를 업고 그 숲길을 다시 걷는다. 아이를 위한 진혼곡처럼.
그 기억의 끝에 친구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더없이 다정했던 화자는 과거 속의 친구에게 분노를 터트린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밀란 쿤데라, "농담"중에서)
자신만의 고통에 머물러 남편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정아는 자신이 만든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이미 일어나 버린 이제 어떻게 돌이킬 도리가 없는, 자신이 친구에게 준 상처와 같은 일들, 모든 잘못과 오류들은 그렇게 망각 속
으로 또 묻힐 것이다. 인생은 오류의 연속이므로.
한강 작가의 신작 "흰"을 읽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하며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라는 목록을 만드는 여자. 강보와 배내옷이 수많은 흰 것들을 거쳐 수의로 향하는 목록이 인생과 닮았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임을 깨달은 바틀비처럼 그녀는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적어본다. 문득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질 때 우린 무엇을 느끼게 될까. 그녀처럼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11쪽)'를 느낄까. '용감한 게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으므 로, 살아온 시간의 끝에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위태로움을 안고 걸아가는(11쪽)'게 인생일 까.
모든 흰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목록들에 대한 단상을 연작시처럼 이어간다. 시처럼 오랜 머무름 을 주는 소설이라 줄거리는 의미 없다. 그녀는 지구 반대편 유태인이 사라져 간, 폐허에서 다시 태어난 도시를 방문한다. 오래된 기억들로의 여행, '고립되 고 봉인된(26쪽)' 내면으로의 여행. 파괴된 잔해 위에 세워진 도시는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30쪽)' 오래된 것과 새것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무늬. 죽음과 삶이 만들어 내는 무늬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자신의 언니, 정아와 화자가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듯 초유를 남기고 간 아이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어버린
(120쪽)' 아이를 땅과 가슴에 간직한 아버지, 언니와 함께 하는 삶을 그리워하며 언니가 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
그이에게는 언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까. 한 시간 동안 눈을 열고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 아직 시신경이 깨어나지 않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36쪽)
칠십 년 전의 폐허위에 복원된 새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삶은 언니라는 폐허위에 얹어진 삶인 듯 묵지근하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38쪽)' 온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을까.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58쪽)' 삶이라는 게 죽음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면, '진눈깨비처럼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는(59쪽)' 찰나에 불과한 삶이라면,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90쪽)'삶이라면,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히며
(110쪽)' 인생이라는 찬 입김을 들이마시고 체온으로 덮여진 따뜻한 입김을 불어내며 삶을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오류와 망각의 연속이더라 도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 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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