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 김상현
나와 봐
어서 나와 봐
찔레꽃에 볼 부벼대는 햇살 좀 봐
햇볕 속에는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려고
맷새들도 부리를 씻어
들어봐
청보리밭에서 노는 어린 바람소리
한번 들어봐
우리를 부르는 것 만 같애
자꾸만 부르는 것 만 같애
김상현의 '오월'이란 시에서 ‘나와 봐, 어서 나와 봐, 찔레 꽃 볼 부벼 대는 저 햇살 좀 봐’, 라는 싯귀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어린 날 화단 앞에서 이와 비슷한 심정으로 ‘나와 봐’하고 간절하게 외치던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며칠 째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땅에 난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다. 화단에는 따듯한 봄볕이 살그머니 들어와 구름을 타고 사라진다. 채송화 뒤로 발꿈치를 들고 서있는 금잔화, 금잔화를 호위하는 모란과 해당화가 봄볕을 붙들고 놀아달라고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다. 꽃들이 제 아무리 울긋불긋 꽃문을 열어 팡팡 꽃소식을 터뜨려도 나는 화단에 난 작은 땅구멍 외엔 관심이 없다.
꽃밭 여기저기에 내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큰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에 검지손가락을 쏙 집어넣으니 구멍이 뻥 뚫려있다. 나는 아침이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땅구멍 앞에 앉아서 구멍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봤다. 어떤 날은 새끼손가락만한 구멍이 옆에 또 생겨났다. 꽃밭을 종횡무진 주름잡는 개미는 구멍엔 관심이 없는지 구멍 옆길로만 다닌다. 꽃대궁을 오르고 있는 검정 색 큰 개미를 집어서 구멍 안으로 넣었다. 개미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몸을 비틀면서 밖으로 나온다.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흙이 부드러워진 탓인지 깨알만한 흙알갱이가 소복이 쌓인 개미굴도 여러 개가 있다. 그런데 저 손가락만한 땅구멍 속에 도대체 누가 살고 있을까? 나는 화단에 생긴 땅구멍에 무엇이 사는지 날이 갈수록 더 궁금해졌다. 어떤 날에는 입을 구멍에 대고 ‘어서 좀 나와 봐’하고 속삭이기도 했다.
드디어 땅구멍 주인을 만났다. 모란꽃이 필 무렵이었다. 작약은 이미 져서 갈색 꼬투리 씨앗주머니를 만들고 모란은 분홍빛 꽃잎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모란꽃 꽃잎 속에 노란꽃술을 만지려고 손을 내밀다가 발밑에서 꼼지락 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침이면 쪼그려 앉았던 바로 그 지점, 땅구멍 부근이다. 움직이는 것을 손으로 덥석 잡았다. 갈색을 띤 이 녀석은 꼭 가재처럼 생겼다. 할머니한테 꼬물대는 녀석을 가져갔다. 할머니는 ‘아이고 귀여운 땅강아지구나’하신다. ‘아하! 이름이 땅강아지라니’ 나는 꼬물거리는 땅강아지가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땅강아지!’라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 ‘땅강아지’가 가슴 속에 쏙 들어왔다. 나는 화단 속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빗속에서, 안마당 주위의 모든 빛과 모든 소리와 풍경 속에 진실로 달콤하고 아늑한 사랑이 펼쳐져 있음을 느꼈다.
나는 이따금 땅강아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것이 엄지와 집게 사이 손바닥 사이로 파고들게 하는 재미에 빠졌다. 땅강아지는 껍질이 단단하다. 그러나 내 손바닥 구석 쪽으로 발발대고 기어갈 때면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다 고것의 허리둘레를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잡으면 다리를 버둥거리고 간지럼 타듯 허리를 구부렸다. 어쩌다 땅에 떨어지면 재빨리 주둥이와 앞발로 땅을 파서 들어갔다. 가재 앞발은 집게 모양이지만, 땅강아지의 통통한 가슴 양 옆에 붙어있는 앞발은 꼭 아기손바닥 같다. 아기 손바닥 같은 앞발로 땅을 잘도 판다. 땅을 팔 때 앞발로 순식간에 흙을 파헤쳤는데, 땅의 구멍을 꼭 자기 몸 굵기만큼 팠다. 성인이 되어서도 땅강아지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아마 땅을 파 내려가던 아기 손바닥 같은 땅강아지의 앙증맞은 앞발 때문인지 모른다. 그밖에 지렁이나 지네, 그리마 같은 것은 못 생겨서 땅강아지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들이 눈에 띠기만 하면 나는 눈을 부라리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하늘에서는 오월의 햇볕 속에서 노래를 부르려고 멧새가 부리를 씻고, 땅에서는 땅강아지가 땅속을 부드럽게 하느라 땅구멍을 들락거렸다. 오랜만에 외갓집에 서울서 손님이 왔다. 큰외숙모가 아기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기는 누워만 있고 뒤집거나 기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일 정도 지났던 거 같다. 큰외숙모의 첫 딸인데 이름이 금선이다. 금선인 방긋방긋 잘 웃었다. 한창 땅강아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땅강아지보다 더 꼼지락 대는 아기가 내 앞에 나타났으니 나는 아기를 보는 순간 만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러나 외숙모는 내가 아기를 해코지 할까봐 아기를 못 만지게 했다. 외숙모와 할머니는 안방에 아기를 눕혀놓고 부엌에 잠간씩 가 있었다. 나는 방안을 서성이다가 아기 곁으로 다가 갔다. 아기는 나를 보자 방긋 웃는다. 하얀 저고리 사이로 뾰족이 나온 손을 얼른 만져봤다. 말랑한 손은 땅강아지의 앞발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기의 손을 내 볼에 부벼대니까 아기는 방긋거리며 발을 바둥거린다. 나는 틀림없이 아기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아기를 안았다. 베개를 업었을 때처럼 아기를 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를 등 뒤로 돌리는 순간 아기가 꽝! 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또 아기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는 아기를 놓치고 그대로 서 있었다. 부엌에서 할머니와 외숙모가 달려왔다. 아기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엉엉 울었다. 외숙모가 아기를 달래는 동안 할머니는 아기를 만졌다고 내게 큰소리로 ‘어디 맴매 좀 맞아볼래?’하면서 야단 치셨다. 그 뒤로 나는 외숙모가 서울 갈 때까지 금선이의 손을 만져보지 못했다.
해당화 꽃냄새가 좋았다. 하지만 땅강아지를 보기 위해 무진장한 시간을 화단 앞에서 꼼짝 않고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차츰 지겨워졌다. 햇볕은 이마를 간지르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들에 있는 나뭇잎 하나하나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땅강아지의 예쁜 앞발을 어느새 잊고 바깥으로 쏘다녔다. 가끔씩 멧새들이 푸드덕 거리는 청보리밭에 들어가 새들을 쫒아다니곤 했다. 아침 공기는 보릿날의 까칠한 촉감을 오후 햇살보다 더 따갑게 느끼게 했다. 단발머리를 한 내 목 뒷덜미는 어린 바람결이 만져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한층 더 길어져갔다. 나는 집안의 화단 보다 집 부근 야산에서 산딸기 따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계절 중에서 봄, 특히 오월이 되면 유난히 몸과 마음이 어려진다. 모란이 피는 오월에는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부르는 거 같아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친구들을 찾으러 약수터에 가다가 깎아지른 벼랑 꼭대기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적이 있다. 그때도 오월 어느 일요일이었다. 당연히 친구들은 거기에 없었다. 나뭇잎이 부풀고 나뭇가지가 물오르면서 산속에 있는 나무들이 봄 햇살에 기지개를 켜는 소리였을 거라 추측한다.
내가 땅강아지를 간절히 불렀던 때가 오월이다. 바깥에서 어린 바람이 나를 ‘나와 봐, 어서 나와 봐’하고 살랑살랑 불러대던 때도 오월이다. 지금도 오월이 되면 바깥에서 햇살이, 샛바람이, 멧새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나는 잠간이라도 밖으로 나가 오월의 햇볕을 쬐면서 아기 손바닥 같은 땅강아지의 앞발을 그리워하며 집 주위 철쭉꽃이 만발한 뿌리 쪽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그리고 가만히 ‘나와 봐, 어서 나와 봐, 내 손에 볼 부벼대는 저 햇살 좀 봐’하면서 오월의 바람 한 올을 뺨에다 대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