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새집짓기 프로젝트

2. 엄마와의 시간 (2020~2022.06)

by 복사꽃향기


몇 년 전부터 엄마의 소원이 '턱이 없는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하셨다. 지금 살고 계신 집은 높은 계단과 턱이 있어 움직일 때마다 계단 오르듯이 오르락 내리락해야 되는 옛집이었다. 엄마가 나이가 드시면서 관절이 점점 약해져 자주 넘어져 혹시나 크게 다치시지나 않을까 하고 가족들은 늘 불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집을 새로 짓자고 가족들이 여러 번 의견을 드렸지만 없는 살림에 손재주와 기술을 두루 갖춘 아버지가 손수 벽돌 하나하나를 찍어 만들어 지은 집이었기에 당신 손으로 그 집을 허물기쉽지 않았는지 가족들의 간절한 호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오랫동안 새집에 대한 기대를 놓고 살았다. 엄마의 간절함 속에서도 딸의 입장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에게 집을 지어드려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살아생전에 좋은 집에서 한번 살아보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실행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진행 중에 생기는 일들은 또 그때 그때 의논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판단력과 추진력이 좋은 둘째 언니와 상의를 했다.


언니도 너무나 바라던 일이라며 더 늦기 전에 무조건 엄마에게 집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왠지 이때가 아니면 엄마에게 새집을 지어 드릴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둘러 시작에 돌입했다. 사업경험이 있던 언니는 대구에서 저렴한 가격에 효사랑 집짓기 프로젝트라는 사업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엄마 혼자서 사실 적당한 평수에 우리가 생각했던 금액이 얼추 맞아진 것 같아 추진하기로 했다.

의견이 구체화되자 엄마에게 말씀드렸고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셨다.


며칠 뒤 프로젝트 사업의 관계자가 직접 집에 와서 프레임을 짜기 전에 집 상태를 보고 어떤 식으로 집을 짓고 싶은지 가족들의 의견도 듣고 견적도 내어 보았다. 이왕 시작한 것 하루빨리 지어 엄마를 편안하게 지내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의 진행에 앞서 둘의 의견으로 밀어붙일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집인데 가족 모두에게 알리는 게 옳다 생각해 온 가족이 모여 회의를 했다.


처음부터 가족 의논 하에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가족이라고 다 찬성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엄마를 위한 집 짓기가 또 무산이 될까 염려되어 언니와 둘이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기로 했다는 우리들의 뜻과 진행과정에 대한 상황을 설명을 하고 가족들의 의견을 물었다. 집은 무조건 지어야 된다는 전제조건하에 가족들이 혹시나 오해가 생길까 최대한 순리대로 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모든 권한은 아들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형편상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말이 나오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언니와 둘이서 하기로 결정했고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엄마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다 보니 가족 모두에게 부담을 지었다면 엄마에게 집도 못 지어드리고 분란만 일어날게 뻔했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도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알게 되었다. 어떤 마음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지를.


옆에서 가만히 가족들의 의견을 듣기만 하던 남편이 흐름이 본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단호히 결론을 내렸다. 가족들 중에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만큼만 내고 나머지 비용은 얼마가 들던 우리가 다 부담하겠다며 남편이 총대를 매었다. 그래서 차후 집에 들어갈 비용은 해결되었고 그다음은 평수와 구조에 대해 또 의논을 했다.


이왕 집을 짓기로 했으니 나중에 가족 누군가가 와서 살 것을 생각해 좀 더 큰 평수로 집을 짓기로 했다. 집을 짓기 위해 취득세, 등록세, 측량 등 법무사를 통해 증여, 상속의 문제까지 준비하고 알아보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복잡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집을 짓고 한번도 측량을 해본 적이 없었고, 토지정리를 하지 않고 살았기에 집터에 대한 지분에 돌아가신 옛 어른들까지 여럿 올라져 있어 매우 복잡했다.


그래서 법무사님이 제일 좋은 방법은 올해부터 '특별 조치법'이 시행되어 새집을 지으면 명의자를 자녀분 중에 한 사람 명의로 하는 게 앞으로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라며 누구의 명의로 할 것인지 결정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의논 끝에 비용 문제나 남편이 퇴직을 하면 시골에 와서 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우리가 적임자라 생각하고 내 명의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께 또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제일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반대하던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반대해도 어떻게든 밀어붙여 볼 작정으로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만났다.


그동안의 모든 결정된 사항들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여러 상황상 집 명의를 내 앞으로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장남 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펄쩍 뛸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알았다며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주셨다. 아버지의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에 가족들은 적잖이 놀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주실 아버지가 아닌데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의 짐작이 맞았다. 구순이 넘은 아버지가 명의를 가진들 의미는 없었다. 새 집을 지으면 그 핑계로 집으로 들어오실 생각으로 쉽게 명의를 넘겨주신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 뜻은 중요하지 않았다. 집을 지을 수 있게 된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새집을 짓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가족들이 다 모여 맛있게 식사도 하고 즐거운 대화도 나누며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도 오래간만에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언니와 함께 갔다. 아버지는 항상 언니를 섭섭한 딸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고집스럽고 배려심 없는 행동에서 비롯된 일들이었지만 본인 탓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무조건 나쁜 자식으로만 보았다. 우리 모두 엄마만 생각하는 자식으로 여겼다. 특히 언니의 존재가 아버지에게 더 각인이 되어 있었다. 언니가 아버지 마음을 풀어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받아주지 않았고 섭섭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사이다. 서로 성격이 너무 닮아 절대로 굽히는 법이 없어 더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버지가 언니가 대화를 시작하면 조마조마하다. 또 무슨 사달이 날까 싶어

처음엔 좋게 시작을 했다가 결국 언성이 높아져 좋게 마무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니도 나이가 들고 보니 아버지께 너무 모진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그렇게 하게 만든 것도 아버지였지만 자식이니 이제부터는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다며 언니는 아버지께 최선을 다했다. 따뜻이 챙겨 드리고 살갑게 살펴 드렸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언니는 늘 같은 마음이었다.


그날도 아버지 드실 것 필요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숙소에 모셔다 드렸다. 미리 언니에게 다짐을 시켰다 절대 아버지와 대립하지 말라고. 언니도 이번 만은 엄마를 위해 꼭 참겠다고 했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방에도 들어가지 말고 아버지 모셔다 드리고 바로 나오자고까지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신지 잠시 앉았다 가라고 자꾸만 발걸음을 잡으셨다. 어쩔 도리 없이 잠시 앉게 되었고, 그때 아버지가 “명의를 넘겨주고 나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다.” 하시며 위로받고 싶다는 내색을 비쳤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겠다 싶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들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언니도 그동안 애쓰셨다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러다 갑자기 예민한 한마디가 나오자 또 서로 따지고 들었다. 왜 지금껏 효도해 온 자식을 저렇게까지 오해를 하고 있으며 그냥 아버지의 넋두리로 생각하고 들어만 주면 될 것을. 결국 아버지 입에서 자식도 아니다란 말까지 나왔다. 도저히 참고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를 끌어당기다시피 해서 아버지의 숙소를 나와 버렸다. 언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언행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너무나 속상함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언니와 아버지의 응어리진 아픔감정보다 엄마에게 집을 지어드리려고 온갖 노력을 해왔는데 무산되면 어쩌나 싶어 한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지금 집 짓는 일이 가장 급선무고 간신히 아버지 허락을 받아놓은 이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어야지 명의를 못 주겠다고 하면 어쩔 거냐”라고 이때는 나도 너무 화가 나서 막무가내로 언니에게 소리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언니는 “우짜믄 좋니?" 했다. 이왕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아버지를 최대한 달래 보는 수밖에. 언니도 걱정이 되었는지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다. 화난 아버지는 언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이고야 큰일 났다. 아버지가 전화 안 받는다. 우짜믄 좋니? “했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전화를 받으셨다. 언니는 눈물콧물 다 흘리며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했다. 아버지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사과 속에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엄마를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명의 넘겨주는 일에 대해 번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허락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쉽게 해결되어 집 짓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알 리 없는 엄마는 너무 좋아하셨다.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만큼, 그 정도로 간절하셨다.

엄마는 자식들이 집을 지어 준다고 하니 무척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팔순의 나이에도 열정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웠다. 우리 엄마는 여러모로 참 대단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살게 될 집이라 그런지 주위에 지어 놓은 예쁜 집을 열심히 살펴보고 다니셨다.

마음에 꼭 드는 집을 발견하고는 그 집을 지은 건축가가 고향사람이었고 그래서 더욱 더 신뢰가 간다며 그분께 의뢰를 부탁했고 그 건축가님의 주도하에 집 짓기에 돌입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 지을 동안 엄마가 기거할 곳을 고민하던 중 바로 옆집이 마을회관이라 어르신들의 동의를 얻어 집 지을 동안 그곳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 코로나19가 심해 면역이 약한 어르신들을 모이지 못하게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어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를 자주 보러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선택해야 할 사항들을 금방금방 선택해 일의 진전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우리 가족들에겐 너무 좋은 시기였다. 그래서 다 때가 있다고 하나 보다고 생각했다. 일의 진행에 있어 모든 일들이 막힘이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엄마는 자식이 지어주는 집이라고 열심히 옆집을 왔다 갔다 하며 발품 팔아 혹시라도 부족한 부분이 없나 꼼꼼히 살펴보셨다. 덕분에 우리도 걱정이 덜 되었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전화해 본인의 의견을 참고하도록 하는 소통의 역할도 충분히 해 내셨다. 여느 80대 노인이 아니었다. 수많은 선택과 답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 속에 집은 점점 형태를 갖추어 나갔고 새집에서 불편함이 없이 살 엄마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니 흐뭇해졌다. 그리고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다. 우리 가족 모두 다 너무나 설렘 가득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엄마는 행복한 모습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폴짝폴짝 뛰어가며 온몸으로 행복감을 표현하셨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보람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엄마의 모습은 우리를 더욱더 행복하게 해 주었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지금껏 살아와도 엄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자식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신 분이다.


그렇게 5개월간의 노력과 힘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엄마의 집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사할 때는 손이 없는 좋은 날을 받아 이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기본 절차에 엄마는 언니와 함께 좋은 날을 받으러 점집을 갔다.


점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고통 속에서도 살 수 있었냐"며 엄마의 한 맺힌 인생사를 줄줄이 읊더란다. 그 얘기를 듣고 언니도 눈물이 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며 얼마나 울었는지 둘이 눈이 퉁퉁 부어 돌아왔다. 그 얘기에 엄마도 조금은 보상을 받은 느낌도 들었고 속도 시원하다며 꽤 기분이 나아져 보였다.

그렇게 해서 받아온 좋은 날로 이사를 하던 날 엄마의 들뜬 기분은 감출 줄을 몰랐다. 엄마의 마지막 남은 시간들은 본인의 바람대로 행복을 누리며 사시라고 안락한 집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서로 의논하며 최선의 준비를 했다.


엄마가 정원을 거닐며 편히 쉬시라고 원목그네와 야외 테이블을 세트로 테라스 위에 놓아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이유인즉슨 우리 처지에 이런 사치스러운 것은 동네사람들이 욕한다며 계속 입에 달고 계셨다. 남의 눈치를 먼저 보는 아버지의 생각에 화가 났다. 비싼 돈 들여 가며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노력했지만 관심도 없는 남 생각으로 자식들의 고마운 마음을 왜곡시키고 계셨다.


아버지에게 애써 웃으며 갖은 애교로 한 번 앉아보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려도 한 번을 앉지 않으셨다. 캐캐묵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옳지 않은 고집만을 부려가며 가장 소중한 가족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언짢은 표정만 짓고 계셨다. 참 매정하고도 무심한 유별난 아버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람성격은 절대 안 바뀐다고 하지만 나는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바꾸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분명 바뀌어진다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마음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아버지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그래도 아버지의 눈치를 많이 보며 마음을 살폈다. 필요 없는 고민과 시간을 들여 어렵사리 해 놓으면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언니들은 아버지의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며 꼭 의견을 물어보았다. 절대로 언니들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오히려 문제가 생겼다. 수십 번을 겪어보고도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 보겠다고 노력하는 언니들이 안쓰럽기보다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항상 힘겹고 버거운 시간들이었다.


엄마는 우리의 깊은 그 마음을 아시고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며칠 뒤 우리 가족들은 엄마의 이삿날에 이웃 어르신들을 모시고 엄마를 위한 감사 잔치를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집들이 잔치에 와주셔서 집이 너무 좋다고 덕담도 해주셨다. 그날 엄마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목소리가 격양이 되어 잠시도 앉아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소개해 가며 하루 종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며칠 동안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추 짐정리가 되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에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 감사와 수고로움과 행복감등 교차되는 감정들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했다.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는 남편이 집을 짓는 비용을 부담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가족들 모두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남편은 “좀 더 일찍 지어드려야 했는데 이제야 하게 되어 아쉬운 부분이 많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엄마는 “지금이라도 짓게 되어 너무 좋다. 내가 사는 동안 새집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렇게 새집에 들어오고 보니 이게 내 집인가 싶고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족들의 의논해서 아버지도 집에 모시고 와 사시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그날 바로 짐을 챙겨 집으로 모시고 왔다.



keyword
이전 08화다급한 전화벨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