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평생을 살면서 동생들에게 차가운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마음 따뜻한 큰언니가 있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으나 귀한 대접받고 자란 여느 집과는 다르게 동생들과 부모님을 생각하느라 자신의 존재를 잊은 채 숨죽여 살다 보니 이제야 뒤돌아 본 자신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에 무척이나 우울해한 적이 있었다.
늘 잘 웃던 언니가 언제부턴가 웃는 모습보다는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을 더 많이 보게 되었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일상적인 날에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부정적인 말만을 뱉어냈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마다 순탄하지 않았고 그 이유로 지나친 불안감에 집중을 하지 못해 자주 다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큰 수술도 여러 번 받았다. 그런 언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무겁기만 했다.
맏이로 태어나 배움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아야 했기에 막상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섣불리 도전 한번 해 보지도 못했던 그 마음을 언니와 함께 한 시간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한해 한해 달려가는 시간을 대하고 보니 이제야 후회되는 게 많다고 했다.
작은 도전에도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과 그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낮은 자존감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기에 점점 더 자신이 초라해져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에 순간 나 자신을 반성했다.
일에 파묻혀 살아야 했던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키워준 언니에게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죄책감 마저 들었다.
언니는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애정으로 키우면서 평생 화 한번 내지 않았고 하늘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늘 포용해 주었으며 이해해 주었고 또 아껴주었다.
그런 언니였기에 낮은 자존감을 확인했을 때 너무나 슬퍼고 가슴이 아팠다.
그날부터 며칠을 고민을 했다. '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언젠가 '노인 미술심리 치료사'라는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그 과정 속에 '필사'가 있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언니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단 답을 찾은 것 같아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필사를 처음 시작하는 언니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꼼꼼히 골랐다. 그리곤 예쁜 노트, 펜을 구입해 필사를 한번 시작해 보라고 했다. '거절하면 어쩌나' 했던 잠시의 고민이 무색하리 만치 언니는 좋아하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장 해보겠다는 열정도 보였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매일 쓰라고 했다. 바쁘면 최소한 한 줄이라도 쓰라고 했다.
한 달쯤 지나 '시작은 했을까'하는 궁금증을 안고 언니에게 확인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필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필사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지금까지 매일 쓰고 있었다. 언니의 그 꾸준함에 감탄했다.
매일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언니는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변화가 언니에게 찾아왔다.
옛 속담에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부터 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필사하기 전과 후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언니도 스스로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놀랬다고 했다.
가족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도 밝고 잘 웃었으며 조금씩 자신감도 보였다.
그 짧은 시간에 회복될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믿기지 않는다면서 그 작은 행동이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특별히 기대도 하지도 않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내용에 몰입하게 되었고 책 속의 글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말들이었기에 마음으로 새기며 '앞으로는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삶의 자세와 방향을 잡게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불안함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자리를 잡았다.
깨달음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면서 필사를 추천해 준 나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제는 가끔씩 언니의 노트를 확인해 보는 즐거움도 생겼다.
항상 긍정적인 글로 가득 찬 언니의 노트는 도리어 내게 가르침을 줄 때가 많다.
하루 일과를 마친 언니는 하루의 감사함과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을 꼼꼼히 기록해 두기까지 했다. 앞으로 언니의 일상이 얼마나 멋진 날들로 채워질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 버렸다.
언니가 이렇게 잘 해낼 줄을 정말 몰랐다.
언니의 행동은 자신뿐 아니라 나에게도 삶을 대하는 태도를 뒤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결과를 스스로 이루어 낸 멋진 언니다. 이런 게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아는 자세와 배우려는 자세를 동시에 이루어 냄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사이 어휘력도 많이 늘었다. 가끔 방송국에 글을 적어 보낼 때가 있는데 전과 다른 한층 높아진 글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많아 선물도 많이 받았다.
"선물로 부자 되게 생겼다"며 행복한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언니는 지금의 결과가 필사를 추천해 준 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것은 행동하는 사람의 것이다.
행동하고 노력으로 이어간 사람은 언니였으며 결과물을 만든 사람도 언니인 것이다.
언니가 자랑스럽다.
그러면서 지금껏 항상 참아온 성격 탓에 억울함을 당해도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집에 돌아와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에 자괴감을 느끼며 상대방에 대한 억울함으로 눈물만 흘렸다고 고백했다.
언니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속상하고 너무 미안해서.
그리곤 말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악의 없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 주었고 언니는 또 실천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바꿔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이후 언니는 현명하게 대처를 잘했으며 억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도록 애 써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자신감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언니의 이런 소소한 성장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만만한 언니가 아닌 똑순이로 거듭나고 있었다.
타고난 성격은 똑순이였었다. 그저 환경의 지배를 받았을 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언니는 이제 자존감이 다 회복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며 항상 웃는다.
내가 언니의 그 말을 믿는 이유는 언니가 필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부정적인 말만 했었다.
"안된다", " 못한다"등등.
지금은 긍정적인 말만 한다." 할 수 있다고, 다 할 수 있다고"
그 말은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
새로운 것 앞에서 수용하기를 항상 주저했던 언니는 이제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점점 새롭게 변모해 가며 높아진 언니의 자존감을 보게 되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언니의 자존감이 때론 동생의 자존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언니는 알고나 있을까?
지금도 매일 안부 전화를 하며 서로에게 격려를 보낸다.
멋진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언니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