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이 대립하던 날
말이 없고 예민하고 완벽한 성격의 딸이 중학교 3학년 때 사춘기가 왔다.
기본 성향이 너그럽고 잘 참는 편이며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자기의 일을 알아서 잘하고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준 적도 없는 조용한 성격이라 사춘기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춘기가 오자 한마디로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말없던 성격은 더 말이 없어져 버렸고 고집스러워졌다. 무언의 반항과 시위가 합쳐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물어도 대답도 없고 표정은 세상에 있는 고민을 다 끌어안고 있는 사람처럼 하고 있었고 해야 할 말도 하지 않았으며 학교 갔다 와도 사람이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은 딸아이란 생각에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되었고 딸은 알아서 비위 맞춰 주는 엄마에게 그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더 당당하게 굴었으며 정신 차려 보니 엄마는 어느새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참아주려고 했던 시간 속에 딸아이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주위의 일들까지 겹쳐 그 무게감에 한계가 왔는지 나도 모르게 폭발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딸이 모의고사를 치고는 학교에서 좀 일찍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들어오는 딸에게 "일찍 왔네. 시험은 잘 봤나?" 하면서 평상시 물음으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마음처럼 시험을 못 봤는지 말하는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대답도 없이 방으로 직행하더니 애꿎은 문을 '쾅'하고 닫아 버렸다.
공부를 곧잘 하는 딸이 '얼마나 속이 상하면 저럴까' 생각하며 위로하려고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딸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만의 교육철칙이 있었다.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말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 온 내 감정들이 그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딸의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 태도를 보고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 좀 못 볼 수도 있지~~ 엄마한테 그 태도가 뭐냐고?" 하면서 지나친 딸의 태도에 대한 훈육 아닌 훈계를 시작했다. 딸의 표정은 무엇이 그리 언짢은지 얼굴엔 날이 썬 채로 나를 째려보는 그 모습이 더욱더 나를 자극하고 말았다. 둘의 감정은 점점 더 고조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젠 이성적으로 대화하긴 글렀다.
그런 감정을 움켜쥐고 차마 엄마한테 마음껏 대들지도 못하고 제 딴에 참느라 긴 머리를 치렁치렁 드리우고 고개를 푹 숙인 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힘겹게 대립하고 있었던 그 순간 감성을 따르고야 말았다.
딸은 자기감정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나는 너무 화가 나 가위를 들고 와서는 딸의 머리를 잠깐의 고민도 없이 확 잘라버렸다.
잘린 딸의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내가 미쳤구나"하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딸은 애지중지하던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나뒹굴자 두손으로 쓸어 부여잡고는 주체하지 못한 울음을 아파트가 떠나갈듯이 뱉어냈다. 도저히 어떤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아무 생각하지 말고 좀 자라" 라고 하고는 딸아이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밖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사춘기 딸에게 한 행동은 지나치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기 때문에 그리 걱정할 일을 아니었다. 하지만 딸이 받았을 상처가 좀 컸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서로가 좀 진정이 되고 나서 딸을 불렀다.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딸도 진심은 아니겠지만 일단 사과를 했다.
"머리는 미용실 가면 예쁘게 해 주니 걱정하지 마라" 하며 미용실엘 보냈다.
다행히 짧은 머리가 잘어울렸다.
그렇게 그 시간이 지나갔다. 딸에게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 후로는 항상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생활면에서도 밝고 잘 웃었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든든하고 고마운 딸이 되어주었다. 딸이 대학을 가고 집에 남은 짐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그날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그날의 일기장엔 엄마를 향한 독기품은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청소하던걸 멈추고 나는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집에 와서는 욕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우리 애가 이렇게 욕을 잘했나 싶어 귀엽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풀어줬으니 고맙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왠지 그 욕설이 오히려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분명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 일이 잊혀질때쯤 혹시나 하는 미안한 마음에 딸에게 물었다.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느냐?" 고 했더니 " 잊었다"고 한다.
진심인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신 한번 나의 행동을 되돌아본다.
고맙다~~ 우리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