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간병일기 (1-2)

3. 엄마의 간병일기 (2022.06~2023.04)

by 복사꽃향기

그렇게 석 달 정도 지났을 때쯤 이모로부터 엄마가 통증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증도 자주 오는 것 같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빨리 말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다짐을 시켜 드렸지만 자식들 걱정에 또다시 아프다고 말할 수 없어 무척이나 참으신 모양이었다. 몸이 잘 회복되고 있는 줄 알았을 텐데 또다시 아픔을 느끼게 되어 혹시라도 눈치채시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에 “왜 아픈지 모르겠다 병원 가서 영양제라도 맞고 피검사도 해보자” 며 어설프게 둘러대고는 빨리 근처 병원으로 모시고 가 검사한다고 하고는 바로 입원을 시켜야 했다.


엄마가 아파한다는 말에 놀라서 급히 내달려온 언니와 동행해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나 병원에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지금의 몸상태까지 빠짐없이 설명을 드린 후 환자가 병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환자에게도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알리는 것을 권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 가족들과 다시 상의를 했다.

오로지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당장 삶을 포기해 버릴 엄마성격과 처음부터 속인 것을 지금에서 얘기한다면 그토록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던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배신감으로 느끼 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거니와 아픈 엄마에게 마음으로라도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어차피 회복이 어렵다면 알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안 아프니 살겠다"라고 하시며 안심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 후 엄마는 병원에 3주 이상 입원해 계셨고 시간이 지나도 자식들이 퇴원하자는 말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하며 본인의 몸상태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몸은 호전되는 것 같지도 않고 배에 통증은 수시로 찾아오는데도 병원에서는 똑같은 약만 먹이고 특별히 치료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엄마는 그 상황이 갑자기 두려움으로 엄습해 왔는 것 같다. 그때부터 초조해하시며 안절부절못하셨다.


"병원비는 얼마 나오냐, 간병비도 많이 나올텐데 , 링거도 비싼 거 아니냐, 아프다고 의사와 달라고 해도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며 오지도 않는다. 왜 퇴원도 안 시켜 주느냐"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하시며 계속 꼬치꼬치 물으셨다. 그리고는 “내가 아무래도 이상한가 보다” 하며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을 보면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시고 평상시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행동을 하면서 자꾸만 아이처럼 울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상황에 더욱더 사실대로는 말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통증이 있으니 병원에 계시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불안해하는 엄마를 달래느라 하루하루가 가슴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다.


병원에 있는 게 자꾸만 불안한지 엄마는 매일 아침 전화를 하셨다.

어느 날은 "머리를 좀 감아야 하는데 좀 와서 감겨 주면 안 되겠느냐"라고 하셨다.

간병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머리 감기와 목욕을 시켜 드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매뉴얼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건의를 하려다가 집이 가까우니 외출을 허락받아 바람도 좀 쐬게 해 드리고 목욕도 내 손으로 시켜 드리고 싶어 병원에 사정을 얘기하고 외출신청을 했다. 병원 측에서 사실을 알고 간병인 협회로 연락이 간 모양이었다. 본인들이 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그렇게 했다.


부모가 아프면 가족 전체가 너무도 힘이 든다. 조그마한 일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 늘 긴장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알아서 힘들고 몰라서도 힘든 또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대체적으로 일반병원에는 입원을 하고 한 달 이상 있을 수가 없다. 길어야 한 달 반 정도다.

처음 담당의사 선생님께 엄마 상태를 설명드릴 때 엄마상태를 감안해 넉넉한 날짜를 맞춰주었지만 병원 절차상 오래 있지 못하게 되었다. 심한 통증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는 모셔갈 수가 없어서 가까운 요양 병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목소리가 무척이나 상기되어 “아무래도 내가 나을 병이 아닌 것 같다. 죽어도 집에서 죽으련다.”하시면서 무조건 퇴원을 시켜 달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싶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가족들은 밤에 통증이 심할까 봐 무척 걱정을 했지만 급하면 바로 응급실로 갈 생각이었다.


집에 오신 엄마는 본인 손으로 예쁘게 가꾸어 놓았던 꽃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시며 "이제 다 나은 것 같다"며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행복했었다. ‘이렇게만 계셔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엄마의 퇴원소식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 요즘은 엄마로 인해 가족들이 무척이나 자주 모이게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가족들이 자주 본 게 며칠이나 있었을까 싶다.

왜 좀 더 엄마가 건강하실 때 자주 모여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중심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고 최대 피해자는 엄마였다.


그렇게 며칠은 너무나 즐겁게 지냈으며 엄마도 건강하게 잘 계셨다.

그리고는 한번 자리에 눕기 시작하자 일어나질 못하셨다.

나의 모든 생활은 그 즉시 올 스톱이 되었다. 환자식이 조절과 대소변을 받아내고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을 신경써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위해 엄마의 상태를 수시로 알려주었다. 몸상태가 안 좋아 보이면 가족들을 더 자주 오게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끼는 자식들을 원 없이 보셨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를 위해 우리 가족들은 각자 나름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모와 함께 엄마 곁에서 밤낮으로 엄마를 간병했고 가까이 사는 남동생은 매일 집을 오가며 출퇴근을 했다. 바쁜 언니들은 나에게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한 것 같다며 미안해하며 수시로 엄마와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해다 날랐다. 그렇게 애써준 덕분에 오롯이 간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를 위해 우리 가족은 서로를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했기에 어떠한 작은 트러블도 없이 잘 버텨 나가고 있었다.

평상시 너무도 깔끔한 성격이었던 엄마는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을 아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오로지 나만 찾았다.


병에 시달려 힘이 다 빠지고 지쳐 한마디 하기도 버거운 어느 날 엄마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언니가 서둘러 엄마의 음성을 녹음했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삶에 대한 더 이상의 욕심이 없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인 것 같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들한테 너무 고맙다. 나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느 자식이 부모한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이제는 아버지한테 가졌던 모든 미움과 원망이 다 사라졌다. 절대로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버지 옆으로 가야겠다. 그러니 너거들도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마라. 나는 자식들한테 다 받고 가서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다. 그러니 날 위해지어 준 이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내가 하늘에서 항상 지켜봐 주겠다.”며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이어 나가셨다.

6남매 이름을 다 부르시며 고마웠다는 말, 섭섭하다는 말 하시고는, 편찮으신 동안 살뜰히 살펴준 사위들에게도 너무 고맙다고, 그리고 자주 찾아와 즐겁게 해 준 이쁜 손주들까지 이름을 부르며 “고 귀여운 것들!” 하시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셨다.

며칠사이에 기력이 다 빠지고 다리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어떤 약도 효과가 없어 마약 제 만 계속 투약하고 있어 정신도 제대로 차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억지로 지워져 가는 기억을 더듬어 또 그렇게 한참을 쉬어가며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하고 싶은 말 다하셨다.

한번 말할 때마다 숨을 몰아 쉬었다. 얼마나 힘든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홀로 계신 장모님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살뜰히 살피며 최선을 다해준 우리 남편에게 "자식보다 더 자식 같은 사위"라며 진심으로 고마워하셨고 모두 효자 효녀지만 간병을 전담한 내게 너무 고생만 시켜 마음이 아프다는 마지막말로 마무리를 하셨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내게 짜증도 많이 내셨다.

그래도 난 그 모습이 힘겹다 여겨지지 않았고 사랑스러운 아기같이 너무 귀엽게만 느껴졌다.

농담도 하고 소소한 장난도 많이 쳤다. 그런 나의 재롱에 엄마도 많이 웃어 주었다.

나는 엄마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외할머니와 아버지 꿈을 꾸었다"며 "아마도 갈날이 다 되었는갑다" 하시며 체념한 듯 더 이상 아무것도 입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점 상태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너무 반응이 없을 땐 일부러 엄마를 깨웠다. “엄마”하고 부르면 힘이 없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얼핏 반가운 딸의 목소리가 들리니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게 되자 눈에서 제일 가까운 새끼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눈꺼풀을 찾아 억지로 밀어 올린다. 반쯤 뜨여진 눈으로 내가 제대로 보이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보일락 말락 한 옅은 미소를 보낸다. 나도 같이 눈높이로 바라보며 웃는다.

너무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엄마였지만 엄마의 그 귀여운 행동에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평상시 너무 재미있는 엄마였기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엄마의 뽀얗고 따스한 손을 살며시 잡고는 내가 항상 옆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눈빛을 자주 보냈다.


아프다고 사람을 잠시도 가만 두지 않던 엄마가 아프다는 말도, 목이 마르다며 물을 달라는 말도, 그리고 대소변도 보지 않고 눈도 뜨지 않은 채 아무런 미동도 없이 3일 동안 의식 없이 잠만 주무셨다.

혹시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손으로 호흡체크도 해보았었다.

다행히 약하긴 해도 숨은 계속 쉬고 계셨다.

3일이 지나자 엄마는 잠시 최소한의 움직임을 보였다. 눈을 감은채 본능적인 반응만 있었다.

그래서 엄마를 불러보았다. 오래 눈을 감고 있다 보니 눈꺼풀이 붙어 떨어 지질 않았다.

모든 기능이 떨어져 그 짧은 순간에도 살이 썩어 들어가고 짓무르고 진물 같은 것들이 나왔다.

혹시 살갗이 벗겨질까 봐 조심조심해서 계속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계속 엄마를 살폈다. 그런데 숨소리가 전혀 힘이 없었다.


누워있는 동안 너무 배가 아픈지 무의식 속에서도 한쪽으로 계속 웅크린 자세로 침대 몇 바퀴를 돌았다.

그만큼 고통스러워했다. 의식 없는 상황에도 조금만 건 더리면 “악”하고 소리를 질러 자세를 변경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너무 오래 한 자세로 있었기 때문에 혹시 욕창이 생길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엄마의 몸을 움직였다.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4~5명이 합심해서 최대한 조심해서 반듯하게 눕혀드렸다.


다행히 편안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의 숨소리가 왠지 평상시와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 숨을 쉬는 게 맞나 할 정도로 너무 약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모여있는 가족들을 다 불렀다. 혹시 모르니 엄마가 들을 수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하자고 했다.

내가 먼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힘들게 낳아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또 우리 엄마여서 지금껏 너무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그래서 너무 감사드린다고, 그리고 엄마의 바람처럼 늘 가족들이 우애 있게 잘 지낼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평생 힘겹게 지고 왔던 모든 짐 다 벗어 버리고 마음 편히 가시라"라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 엄마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며 각자의 인사말을 따뜻하게 전했다.

그러자 엄마가 알아들었는지 다 듣고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크게 숨을 한번 쉬시더니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엄마의 세상으로 가셨다.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미리 준비해 둔 장례식장 지도사 분들이 오셔서 임종을 확인한 뒤 정중히 예를 다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게 엄마를 모셔갔다. 그렇게 엄마는 자식들의 품 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행복한 모습으로 자식들의 곁을 떠나가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혼자 고생만 시켜서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며 가족들이 위로를 해주었다.


두렵고 불안했던 엄마와의 그 짧은 시간이 평생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래 마음 편하게 엄마와 같이 있어 보지도 못했으며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모든 생각들을 아낌없이 공유할 수 있었던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간병에 전념하다 보니 몸이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었지만 다시 오지 않을 엄마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엄마를 간병할 수 있었던 사람이 나였음에 감사했다. 내가 못했더라면 오히려 후회가 더 남았을 것이다.


부모를 살펴드린다는 게 멀리서 보면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에게 받았던 고마움을 다시 돌려 드리는 수고로움이 잠시 필요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이다. 나는 엄마와 그런 시간을 보냈고 나는 그 순간 참 행복한 딸이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너무 아쉽게도 엄마와의 이별이 너무 빨리 온 것이다.


씩씩하게 미련 없이 떠난다는 말도 마음 아파할 자식들을 위해 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왜 미련이 남지 않았을까 이제 온전한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리게 되었는데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하고 떠나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내 힘겨워만 했다면 그 힘겨움이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갈 것이라는 알기에 그것마저도 안고 가자는 엄마의 사랑이었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위해 삶에 대한 욕심을 놓았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본인의 욕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식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여인! 이 정순 여사님!


키도 크고 얼굴도 희고 고우며 밝은 성격에 똑똑하고 현명하며 지혜롭고 또 부지런했던 엄마, 평생 다툼이 잦았던 부모로 인해 마음 고생한 자식들이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기만 하셨던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엄마 .


그렇게 1938년생 천사 같은 우리 엄마는 한 많은 팔십다섯해의 인생을 살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후 우리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와 엄마의 빈자리를 마음이 태평양 같은 큰언니를 버팀목 삼아 건강한 가족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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