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엄마의 간병일기 (2022.06~2023.04)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해가 지나갈 즈음 심신이 안정되어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핏기가 없는 엄마의 얼굴을 이상하게 여긴 친척오빠가 집 근처 병원에 모시고 가서 검사를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간이 검사 결과에서 몸속에 출혈이 많이 있었는것 같다며 며칠 뒤, 좀 더 정확한 결과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며칠 입원을 해 수혈을 받았고 혈액수치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에 나온 정확한 결과에서 대장 쪽에 5cm쯤 되는 혹이 있는데 암으로 의심이 된다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급하게 큰 병원에 예약을 하고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다.
결과는 대장암 3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우리가족들 모두 그 자리에서 울음바다가 되었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오신 엄마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한해 두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들에게 혹시라도 짐이 될까 늘 염려하며 사시던 엄마였기에 어떻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걱정부터 앞섰다. 결국 가족들과 논의한 끝에 병명을 말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눈치 빠른 엄마를 속이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들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에도 금방 눈치를 채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혹시 본인이 큰 병이 아닌가 싶었는지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말해달라며 의구심을 가진채 계속 물어 보셨다.
여러 과정끝에 어렵사리 수술 날짜를 잡았고 늘 손에 잡히던 혹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필요 없는 부연 설명까지 동원해 최대한 엄마를 안심시켜 드렸다. 다행히 믿으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오로지 빨리 수술해서 조금이라도 자식들 걱정을 시키는 않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빨리 수술하자고 서두러셨다.
수술날짜 까지는 누군가가 엄마 곁에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수술 들어가기 전부터 식이요법, 약물복용, 건강 체크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컨디션도 신경 써야 했다. 감기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철저히 살펴야 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생활을 접어두고 엄마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엄마의 몸 상태와 수술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이 필요해 수시로 가족들이 병원을 오가야 했다. 시간이 되는 가족들이 돌아가며 상담을 하러 가다 보니 제대로 된 내용이 없어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전담해서 케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바쁜 가족들을 대신해 내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상담 요청이 있을때는 결정해야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결정권이 있는 가족과 함께 다녔다. 그 시점이 코로나가 심했던 시기라 수술전과 후에는 보호자 한 명만이 간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 마음의 무게도 함께 짊어진채 엄마의 병간호에 올인했다.
수술 3일 전, 가족들의 근심과 걱정속에 엄마는 나는 입원수속을 밟았다.
수술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온몸에 링거를 꽂아야 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피검사를 위해 수시로 피를 뽑아 엄마의 양쪽팔은 시퍼런 멍으로 물들었다. 사실 엄마는 마음이 여려서 엄살이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빨리 수술해서 자식들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이 역력했다. 엄마는 그때 대장에 있는 혹만 제거하면 다 낫는 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드디어 수술하는 날이 되었다.
엄마에게 이렇게 큰 수술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드에 누운체 수술실에 들어가며 불안해하는 엄마의 눈빛과 마주치자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엄마의 존재란 이런가 보다. 마치 내 몸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후 난 온 신경이 엄마에게 가 있었다. 응급 상황이 생기면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전달해 주어야 했기에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많이 되었다.
수술은 복강경 수술로, 복부의 4~5곳 뚫어 대장의 반을 잘라 소장과 연결하는 대수술이었다. 생각하고 있는것 보다 전이가 많이 되어 있다면 개복 수술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말을 들은 터라 걱정을 많이 했다. 수술이 무사히 끊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7시간이 지난 후쯤,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다행히 개복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전이가 37곳이나 되어 있긴 하지만 일단 잘라낼 부분은 깨끗이 제거했으니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어떤 치료방법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방사선 치료,항암치료 역시 나이가 많아 견디지도 못할뿐더러 치료한다고 해도 환자만 고생만 시킬 뿐이라며 앞으로도 치료는 없을것이라고 했다. 수술상황은 대장만 통과 되도록 해서 마무리했다고 하셨다.결과는 참담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온 엄마를 정성껏 간호했다. 병원에서 알려준 필요한 기구를 준비해 후유증없이 회복할 수 있도록 폐활량을 높이는 운동과 걷기 운동을 수시로 도와 드렸다. 수술후라 힘들 텐데도 엄마는 한시라도 빨리 나아서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뭐든 열심히 했다.
엄마가 중환자 이다 보니 간호사들이 무척 신경을 썼다. 수시로 찾고 묻는 바람에 잠시도 자리를 비울수가 없었다. 잦은 변동사항에 대처할수가 없어 수첩에 시간별로 대소변 양, 마신 물의 양. 폐활량운동, 걷기운동한 횟수, 링거약 이름, 엄마의 몸 상태, 담당의사 회진 때 물어볼 사항 등을 간호사들이 언제든 와서 확인할수 있도록 꼼꼼히 체크해 놓았다. 며칠 뒤 담당 의사와 의논해 다른 가족과 교대를 할 때 엄마의 간병 패턴을 알기 쉬워 간호하기가 훨씬 수월했다고 했다.
병원에서 오로지 엄마 간병에만 집중을 했다.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며칠인지 그것도 몰랐다. 며칠뒤 가족들은 살이 너무 빠져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간병에만 신경 쓰느라 내 몸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렇게 살이 빠져 있는줄도 몰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쓰러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악착같이 버텼다.
퇴원하는 날 담당 의사가 혹시 또 아프다고 하면 그땐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라고 권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고 수술도 안되며 회복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서로가 힘든 간호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그 이후 엄마는 무사히 퇴원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신 엄마는 식이조절과 처방약을 잘 챙겨 먹으며 한동안 아프다는 말없이 일상생활을 잘 하셨다. 나도 내 일상으로 잠시 돌아갈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곁에 누구라도 있어야 될 것 같아 서울에 살고 계시는 이모에게 엄마와 함께 계서 달라고 부탁을 했다. 엄마를 친정엄마처럼 생각하는 이모는 우리의 부탁에 바로 내려와 주셨다.
엄마와 이모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정을 나누며 즐겁게 일상생활을 보내고 계셨다. 그러다 이모가 일이 있을땐 내가 엄마를 돌보는 식으로 생활을 했다. 점점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엄마는 내가 돌보아 드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이 건강한데 자식의 시간을 뺏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건강하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나는 너무 좋았다. 자주 농담도 하고 엄마가 언짢은 모습을 보여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다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엄마한테 용돈도 많이 드리고 잘할게.”했더니 갑자기 “용돈은 안 줘도 된다. 네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했다. 엄마가 아픈 것도 너무 속이 상한데 모든 것을 접고 돌보고 있는 나에게 엄마의 그 한마디는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와 슬픔으로 채워진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엄마는 사위 보기도 미안하고 딸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아마도 미안해서 나온 말이었으리라. 그 마음이 느껴지니 더 가슴이 아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힘들어도 엄마를 위해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터라 그동안 쌓였던 참아온 눈물이 대책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엄마에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엄마도 어색해하는 눈치다.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하고 나가서는 펑펑 울었다. 그때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늘 걱정만 하고 있던 언니가 내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던 언니는 엄마도 나도 너무 안쓰러워 어찌하지 못하고 “우짜믄 좋노, 우짜노” 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일단 언니를 안심시키고 집으로 왔다. 그 사이 엄마는 어디 나가시고 안 계셨다. 잠시 후 엄마는 소고기 한 봉지를 들고 들어오셨다.
“내일 네 생일인데 미역국 끓일 때 많이 넣어라.”며 아까 한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 어색하게 건네준다.
처음으로 엄마와의 어색한 시간이 설핏 지나간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는 “엄마 내일 내 생일인 것 알고 있었나?” 하며 반문 한다. “당연히 알고 있지.” 하신다. 그러면서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나눈다. 다음날 소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미역국을 엄마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내 생일은 설날 3일 전이라 늘 시댁에서 명절 제사를 지내기에 친정에서 평생 생일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결혼 후 친정에서 맞이하는 첫 생일이자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생일상이 되었다.
엄마는 그렇게 골고루 다 챙겨주고 가셨다.
나에게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