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기억들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었던 시절은 있다. 주변만 둘러봐도,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군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는 걸 볼 수 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말하고, 그 힘듦의 강도를 잣대로 서로 얘기를 하면 결국 "다 힘들었어"라는 결론만 나온다. 내 기억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얘기를 했다.
세계 모든 이들의 고통보다 한 사람의 고통이 더 강하다.
약 70억 명의 아픔과 고통보다 개인의 고통이 더 크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개개인이 겪는 자극들은 순간순간 견디지 힘들 정도의 고통이다. 그때만큼은 타인의 아픔 따윈 볼 수 없다. 이건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의 시련이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로 첫 부임한 초등학교 교사와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 자녀 없이 홀로 살아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죄송합니다!"라는 사과의 말로 시작한다. 교사 오카노(코라 켄고)는 자기 반 학생들이 '벨튀'했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동네를 다니며 사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아이들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생각하고 있다. 미즈키(오노 마치코)는 하나밖에 없는 딸과 멀리 출장 간 남편과 살고 있다. 그녀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이 준비가 될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다른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과 딸도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미즈키가 공원에서 딸을 대하는 태도와 집에서 딸을 학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세월이 흐르면 어른 된 것처럼 성숙한 척을 한다. 필자는 초등학교에서 3-4학년을 잠시 가르쳤던 기억이 있다. 당시 초등학교는 예술교육 전문 초등학교라는 콘셉트를 잡고, 모든 학생에게 예술과 관련 있는 교육을 하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오카노의 마음이 좀 더 이해된다. 성인인 선생과 아이인 학생들의 대화는 쉽지 않다. 우선 물리적인 눈높이가 다르고, 생각의 유연성도 다르다. 애초에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로 구분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가 갑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갑이었고, 모르는 것이 을의 입장은 선생과 학생, 엄마와 미취학 아동, 치매 노인과 슈퍼 직원이라는 구도 속에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아는 이가 모르는 이를 가르치는 수직적 구조는 본 영화 속에서 완전하게 부서진다.
오카노의 마음이 이해했던 이유는 아이들과의 수업을 통해 단지 가르치고 배우는 단순하고 명확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 중 음악을 싫어했던 아이도 있었고, 관심 없는 아이도 있었으며, 재능과 관심 모두 가지고 있었던 아이도 있었다. 수업을 방해하고 장난만 치는 아이를 보면서 '문제 있는 아이'라고 정의 내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를 보며 느낀다.
"저 아이는 무슨 죄로 한 시간 동안 관심 없는 음악 수업을 들어야 할까?"
그 아이를 지켜보니, 관찰과 증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단순한 두 가지 사람의 구분이 아니라, 선생 하나와 각각의 학생의 관계다. 더불어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선생, 가르치는 학생과 배우는 학생의 관계다. 이런 수평의 관계가 아닌 수직의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만 안길 뿐이다.
영화는 수직의 관계 속에서 자라왔던 어른들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픔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다. "너는 착한 아이"라는 제목은 마치 우리를 향해 위로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에게 주어진 따스한 기억들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는 보는 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