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객관적일 수 없다

by Wenza

20세기의 철학의 큰 두 줄기를 말하자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말하곤 한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어느 날 내게 특별히 다가온 말이 있는데 그건 비트겐 슈타인의 말이다.


개인 겪은 고통은 세상 전부의 고통보다 크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이 말에 지극히 공감할 거다. 사실 어디든지 통용되는 말이리라. 남자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하게 되면 군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군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 간의 누가 더 힘들었는지 말하곤 한다. 후방보다 전방이 더 힘들다. 라던지 행정병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라든지 말이다.


이렇듯 고통의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지극히 주관적'이란 표현은 자연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는 뜻을 갖게 된다. 이렇듯 공감의 부재는 더욱 강화된다. 이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행위를 말한다. 마치 감정 이입돼서 이성을 넘어 마치 심리학적 용어인 해리와 더 비슷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척'이라는 거다.


나는 앉아 있으면, 요추부터 오른쪽 발목까지 저릿하는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몸을 막 다룬 내 책임이다. 그러나 신경을 건들고 있는 디스크를 수술하기도 애매하고, 안 하기도 애매한 상태란다. 신경통은 하루 종일 있고, 조금만 피곤해도 오른쪽 다리에 무리가 온다. 그렇기에 나는 진통제를 먹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성경에 성 바울도 어떤 병인지 모르지만, "내 몸에 가시"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질병을 고백했다. 감히 성 바울과 비교할 수 없으나, 그의 고통은 얕게 나마 이해되는 듯하다.


이 질병을 얻고 나서 나는 고통이 주는 의미에 대해 매일 고민하게 된다. 앞서 말했던 공감에 대한 정의를 말한 이유는 우리가 오해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행위가 아니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 자신의 고통을 더하는 행위. 즉, 동고(同苦)의 정신이다.


공감은 고통을 아는 이가 위로를 아는 이가 해야 한다. 그들은 결코 가벼운 언행을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고통을 통감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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