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포르노에 미쳐있다.
"~도 사람이잖아",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많은 이들이 들어봤을 만한 말일 거다. 단순한 옹호의 말은 가해자에게 사람이라는 격을 세워준다. 그간의 정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개인의 타부를 지키기 위한 모습일까?
필자는 최근 종교계에서 성문제로 제법 가까운 사람의 범죄를 뉴스를 통해 알게 됐다. 더불어 한 교단이 성범죄 목사를 파면을 취소한 사실도 보게 됐고, 과거의 한 목사가 성추행을 했으나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교회를 개척한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이 성범죄가 갖고 있는 역사는 최근의 목회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불어 우리 사회 내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려는 행위가 당연시되었고, 순종적이고 권력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대상을 원하기도 한다. 최근 유명 대학교 내에서 채팅방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무의미하게 살해당한 한 여인의 영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힘을 싣게 하고,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페미니즘은 조회수와 좋아요 수에 미쳐버린 언론에게 무참히 소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은 과거의 남성적-제국적 문화의 산물 속에서 거시적이었던 권력주의, 간편하게 말하면 대의를 위해 희생당해야 되는 당연한 것들을 구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여성, 아이, 자연이나 타자적 모든 존재를.
필자는 우리 세계를 남성우월주의라기보다 여성인권유린 사회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불어 남성이라는 존재이기에 보장되는 안전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회구조적 문제는 결코 성별의 문제로 말할 수 없는 거다. 결론적으로 성별로 말하는 것은 수없이 소모적인 대치 외에 낳는 것은 없으리라. 이것은 힘과 힘의 문제고, 안정과 불안정의 문제다.
앞서 말한 권력자들의 윤리적 붕괴는 안정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피하고 싶은 사실일 거다. 더 나아가 자신이 신앙하는 무언가로부터의 좌절을 외면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옹호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수단으로 다양한 언론과 여론은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자주 경험했다. 이 근간에는 안정을 위한 욕망이 숨어있다.
개인이 속한 단체나 개인에게 유리한 입장을 정의하기 위해 호소하는 것이고, 입장의 차이는 권력의 크기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 어렵다. 서로 간의 소리를 듣기를 거부하고, 왜곡하고, 차단하는 세계 속에서 서로의 시선을 끌어야 겨우 보고 듣게 하는 거다. 필연적으로 미디어는 포르노같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는 거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자극은 사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한 스타의 살해 사건 사진을 반복적으로 이어 붙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무섭게 혹은 자극할 수 있도록 수없이 연구하고 노력한다. 우리네 사회는 잔인하고 비윤리적 행위로 난자하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는 별일 아닌 듯 넘어간다.
"~도 사람이니까"라는 말속에는 사회의 포르노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