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로움. 우리는 어느 순간 외로움과 고독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은 책임감을 갖게 하고, 필연적 갈등을 야기한다. 무엇보다 귀찮다. 자신의 삶도 힘든데, 타인의 삶까지 간섭하는 건 우리에게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단절된 개인을 만들고, 나만의 특별한 장소과 행위를 하곤 한다.
영화《셰임》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외로움을 소비하는 방법을 날 것으로 그린다. 또한 서로 간의 소모적인 관계보다 자기 자신에 더 치중하는 삶, 어쩌면 당연하지만 외로움의 감정은 가슴 깊은 곳에서 쌓여만 간다. 우리는 그렇게 한 겹 한 겹 가면을 쓴다. 칼 융은 본심과 다른, 즉 사회의 눈길에 의식해 형성되는 격(格)을 페르소나(persona, 가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우리 내부에 욕망과 감정들을 숨기는 거다. 이중인격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한 인격은 다른 격을 유지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원초적인 욕망 해소가 필요한 거다. 우리네 미디어는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로 난자하다. 필자가 쓴 포르노 사회라는 글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욕구는 자극에 적응하고 더 강한 자극을 좇는다. 더 맛있는 음식과 더 자극적인 영상, 음란물처럼 자극에 대한 판타지는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무한한 욕구는 타인에게 포착되면 안 되는 비밀이다. 삶을 유지하는 무한한 욕구는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이기에.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속에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수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인내와 상처를 갖고, 버티고 견뎌야 하는 싸움 속에서 벗어나기 원하는 거니까. 우리들이 여행에 미쳐있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우리는 절망적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거다.
브랜든의 현실 도피의 방법은 섹스 중독. 그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경험할 때마다 더 강한 자극적인 방법을 통해 무한한 욕구를 채우려 한다. 필자는 브랜든이 동생 씨씨를 보는 눈빛의 흔들림을 느꼈다. 그건 욕망이었다. 근친에 대한 욕구와 가족이라는 이성을 말이다. 온갖 포르노를 섭렵한 그에게 그런 욕구를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씨씨와의 동거로 인해 개인의 일상이 무너지고, 자신만의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 가면은 스스로 벗을 때, 당당할 수 있다. 남에게 보여지는 속 모습은 무한한 수치심으로 가득하다. 내가 아는 예수는 수치심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간음했다고 오해한 여인을 돌로 치려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는 그들을 막으며,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본 영화를 보며, 브랜든의 모습에 마냥 혐오감만 들었다면 거룩하신 성자던지 판사일 거다.
감추고 싶은 비밀, 어쩌면 브랜든만의 일은 아닐 거다. 영화를 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또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상황들, 아니 여성뿐만 아니라 사람과 상황 자체를 성적 대상이나 상징으로 여기는 것, 적어도 소중한 사람만 대상화를 제외하는 브랜든의 모습은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지 않은가? 브랜든의 수치심은 모두에게 두려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