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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라이 Oct 22. 2023

초짜의 욕심

글을 써도 될까요?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 차갑게 식어버린 운동복을 입은 채 일어선다. 아침 운동으로 깨어난 몸에게 한 번 더 시작을 알리는 의식적 행위를 할 것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난 뒤, 15초 동안 찬물로 샤워하며 마무리하는 것. 40도가 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것은 활성화된 교감신경으로 활력 넘치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다. 우리 몸의 장기는 자율신경에 의해 조절된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뉘는데, 교감신경은 낮에 활동하고, 부교감신경은 밤에 휴식한다. 밤늦게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은 숙면에 방해된다. 적어도 잠자기 두 시간 전에 샤워를 마쳐야 숙면을 취할 수 있다. 만약 저녁 시간에 꼭 씻어야 한다면 미지근한 물로 반신욕을 한다. 지금은 아침 시간. 아침에는 찬물 샤워로 마무리하며 확실하게 활기찬 하루를 예고한다.   



읽고 쓰기 전에는 동적인 활동을 하면 정신도 깨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다가, 러닝 머신 위에서 걷다가, 길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깜빡 졸곤 했다. 어딘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어 병원에 갔다.

"혹시 기면증 아닐까요?"

"기면증은 아닙니다. 겹치는 부분이 없네요."

의사는 기면증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정확한 병명을 말하거나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며칠 후,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이들과 이마트에 갔다. 포켓몬빵이 대유행할 때라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는 게 관건이었다. 아이들은 포켓몬빵보다 포켓몬띠부씰에 열광했다. 포켓몬띠부씰을 얻기 위해 새벽 2~3시부터 담요와 의자, 돗자리를 챙겨 줄을 섰다. 어르신들은 손주들에게 띠부씰을 갖다 주기 위해 가장 먼저 왔다.  우리는 보통 아침 6시쯤 갔다. 먼저 온 사람부터 우선권이 주어져 신제품이나 소량 생산된 인기 포켓몬빵은 사기 어려웠지만, 포켓몬빵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다. 여러 날 가다 보니 자주 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익었다. 이마트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띠부씰이라는 일치된 공감대 속에서 쉽게 가까워졌다. 싸 온 간식을 같이 나눠 먹거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서로의 아이들을 챙겼다. 해가 솟아오르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워져 나무 아래 모여 수다를 떨었다. 어르신들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고, 그럴 때면 나도 보던 책을 놓고 나무 아래로 갔다. 항상 1등으로 오시는 어르신이 여자의 몸으로 자식 둘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물불 안 가리고 일하던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어. 아이들 먹여 살리고 교육도 시켜야 했거든. 잠이 부족해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면서도 졸았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된 부분이 있었다.

"저 얼마 전에 병원에 다녀왔어요. 기면증인 줄 알고."

내 말에 어르신이 웃으며,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날 어르신은 희귀 포켓몬빵을 샀고, 우리가 산 보통의 포켓몬빵과 바꿔주었다. 빵을 두 손에 든 막내는 환하게 웃었다.



그 후로, 1년 넘게 오전과 오후를 오락가락하며 글을 썼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면 기상 후 2~3시간은 황금시간으로 글쓰기나 영어 공부, 목표 설정, 계획 세우기처럼 생산적이고 논리적인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고, 레터 마감날이 아니면 도무지 새벽에 글이 써지지 않았다. 자신감이 발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빈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얀 모니터처럼 머릿속도 허옇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급작스럽게 공모전에 나가게 됐다. 마감일까지 2~3일이 남아 있었다. 마감 날짜가 임박해 이것저것 따져가며 글을 쓸 입장이 아니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글을 써야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Just do it. Simple is the best. 단일한 단순함. 무모했지만, 해보고 싶었다. '마의 시간'에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어둠과 고요함으로 휘감긴 우주 공간에서 내려다보면 찬란한 빛과 엄혹한 암흑이 침착하게 대비되는 곳이 있다. 그곳은 이질적이며 모순되는 두 세계가 맞닿아 있고, 그 두 세계를 아우르며 굽이굽이 초록의 길이 흐른다. 무오류의 공간인 듯 보이지만, 고통을 수반한 그리움의 철책이 질서 있게 이어져있고, 잇따른 철망을 따라 요새처럼 성을 품고 있다.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이어진 역사의 길은 DMZ 접경지역을 따라 산성을 순례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로 시공간이 확장된다.'

네 문장을 적고 나서 시계를 보니 '황금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 글을 써서 응모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정신없이 글을 마무리했다. 이제 제출만 하면 된다고 안도하며 복붙을 했는데, 글이 반토막 나 버렸다. 글자수 제한이 있었다. 글을 대폭 줄여야 했다. 그러나 글을 줄이는 것은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공들여 쓴 글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줄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원가지는 살리고 곁가지만 쳐야 했다. 그게 실력이었다. 얼마 뒤, 공모전 결과가 발표됐다. 당연하게도 공모전에 떨어졌다. 존스 홉킨스대에서 '방향 감각 향상 실험'을 했다. 실험 참여자에게 손을 뻗어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만져보게 한다. 누워서 떡먹기다. 이번엔 10센티미터 오른쪽으로 시야가 이동하는 특수 안경을 끼고, 잔을 만져 보게 한다.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뇌는 계속해서 수정과 실행을 반복하며 잔을 잡으려는 시도를 한다. 결국 몇 차례 허탕을 친 뒤, 잔을 잡는 데 성공한다.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우리의 뇌는 과거의 실패 경험과 이번 실패를 비교, 대조해 인식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다음번엔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글을 써보자고 다짐했다.



공모전 이후로 새벽 시간에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예전에 책에서 봤던 대로 황금시간에 글을 쓰는 것은 유용했다. 그러나 언제나 글이 잘 써졌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막막했고, 앞이 막혀 있는 듯 진전을 보이지 않는 날들이 종종 있었다. 글이란 건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는 것이 아니었다. 연습과 기다림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진전이 없다고 침체되어 있을 순 없었다. 편하고 좋을 때만 읽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유용했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은 경직된 사고와 빳빳해진 신체를 말랑말랑하게 해 주었다. 장르와 무관하게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들었다. 과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오래된 음악들은 현재에도 유효했다. 행복한 길을 활짝 열어주는 듯했다. 음악의 효용을 경험하고 나니 어느새 음악에 의지하게 됐다. 그러나 '의지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달랐다. 주체가 '나'가 아닌 '너'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주도권을 가져와 주체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나를 가만히 지켜볼 때 가능했다. 의타심에 의해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 것인지, 하나의 도구로 인지하고 음악을 듣는 것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의지(支)가 바탕이 되면 음악을 껐고, 굳은 의지(志)가 밑바탕이 되면 음악을 켰다.   



예전에 한 강사님이 "책을 읽는 것은 스트레스 감소에 60퍼센트 효과가 있다. 그러나 글을 쓰면 70퍼센트 효과가 있다"고 했다. 작가 셔우드 앤더슨은 "글을 쓰는 기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있다."고 했다. 거친 글솜씨지만, 글을 쓰면서 '나'가 아닌 '우리'로 가는 기쁨과 글을 쓰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명환 작가는 '300권을 읽으면 책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책과 담쌓고 살다 마흔이 넘어 '책 읽는 재미'가 들렸다. 400권쯤 읽었다. 그럼 나도 이제 책을 쓸 용기를 욕심을 내어 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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