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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an 03. 2022

제11화 - 농업이야기1

산업화 이전에는 식량을 양곡원조에 크게 의존했다

  제11화부터 제14화까지는 농업과 수산업에 관한 이야기다. 농업부터 시작한다. 농업의 사전적 의미는 땅을 이용하여 인간생활에 필요한 식물을 경작하거나 동물을 기르는, 즉 농산물(農産物)을 생산하는 산업으로 정의돼 있다. 농산물은 식물성과 동물성 농업생산물을 총칭하나 농작물(農作物)은 식물성 농산물만을 뜻한다.

      

농산물 공급은 생산주기 동안 비탄력적이다

  농업은 토지에서 생산이 이루어져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생산물의 일부가 종자나 비료 등의 형태로 재생산에 이용되는 순환적 생산과정을 나타낸다. 계절성이 강한 산업이나 오늘날에는 온실재배 등 영농기술의 발달로 다모작의 주년(周年) 생산도 가능해졌다. 기후나 토질에 따른 지역 의존성도 있기에 적지적작(適地適作)하면 지역 특산물이 된다.

  농업의 후방산업은 종묘, 비료, 화학(농약), 농기계, 사료산업 등이다. 전방산업으로는 제분, 제당, 유가공, 육가공 등 식품과 면직, 모직, 실크, 캐시미어 등의 섬유 및 피혁, 그리고 한약 등 의약품산업들이다.

  농산물은 파종 후 수확하거나 입식 후 도축 또는 산란하기까지 일정한 생육기간이 소요된다. 생산기간 중 강수량과 기온 등 기상 상황이나 병충해 발생 등에 따라 생산량과 품질이 달라질 수 있다. 생산주기 동안에는 공급이 비탄력적이다. 그래서 풍년이 들면 가격이 폭락하고, 흉년에는 폭등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대응하여 긴급 수입하거나 비축제도를 활용하기도 한다.


경제학에서는 농산물 파동을 거미집 이론으로 분석한다     

  농산물의 가격과 공급량이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파동 현상을 분석한 경제모형이 거미집 이론(cobweb theory)이다. 다음 수확기까지의 단기 동안에는 공급이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단기공급곡선은 수직선이 된다. 아래 그래프에서 제1기 생산량이 Q1이라면 가격은 수요곡선(D)의 대응점인 P1에서 결정된다. 제2기가 되면 생산자는 P1에 대응하는 장기공급곡선(S) 상의 공급량인 Q2만큼 생산을 계획할 것이다. 제2기에 당초 계획대로 생산량이 Q2가 되면 공급 과잉이 발생하여 가격은 P2로 하락한다. 이어 제3기에는 공급량과 가격이 각각 Q3 및 P3으로 결정된다. 본 예시에서는 가격과 수량이 장기균형점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수요와 공급 곡선의 탄력성, 즉 기울기에 따라 확산될 수도 있다.     

    거미집 모형 

  생산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통업자 또는 소비자에게 생산을 시작하면서 판매계약을 체결하는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을 활용하기도 한다. 가을철에 수확되는 송이버섯의 경우 산주(山主)가 채취업자에게 당해 연도의 채취권을 부여하는 계약을 정월대보름 즈음에 체결하는데 이는 리스크의 100%를 채취업자가 부담하는 방식인 셈이다. 농업재해보험도 생산자가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제도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입 시 중앙 및 지방정부가 보험료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산업화 이전 시기에는 농업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농업을 크게 4개의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기는 1960년까지로 산업화 이전의 농업사회 시대다. 이 시기에는 농지개혁과 자작농체제 구축에 주력했다. 2기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고도성장 시기로 녹색혁명과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1980∼97년의 경제구조 전환기인 3기에는 농업구조 개선과 우루과이라운드(UR) 대응에 역점을 두었다. 1998년 이후의 4기는 신자유주의 개방경제 시기로 고령화시대의 농촌문제 해결과 복지정책 강화가 핵심과제이다. 시대별 우리나라 농업의 실태와 주요 정책을 살펴본다.

  산업화 이전의 농업사회 시기에는 농업이 전체 경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점했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총인구 대비 농가인구의 비중은 72%였고, 1960년에도 58%로 절대 다수였다. 농업의 GDP 구성비도 44%(1948년)와 33%(1960년)에 달했다. 1954년의 경우 전체 취업자 중 농림수산업 종사자 비중이 78%를 차지했다.

  경작 형태는 농지소유자와 경작자가 다른, 즉 농지를 빌려 경작하는 지주(地主)-소작(小作) 관계의 생산구조가 지배적이었다. 1945년 말 현재 소작농가의 비중은 무려 86%에 달했다. 소작만 하는 순소작농이 전체 농가의 50%였고, 나머지는 자작(自作; 자경)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이었다. 소작지 총면적은 144만7천정보로 전체 농지면적 222만6천정보의 65%를 점했다.

농지보유형태별 농가구성비 추이         

   자료 : 농림축산식품통계연보     

  농업이 경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양곡 부족량이 1957년의 경우 586만9천석에 달했으며, 1960년에도 211만8천석을 기록했다. 이는 해방 후 귀국한 해외동포와 휴전 이전까지의 월남자 수가 221만명에 달하는 등 유입인구의 증가에도 원인이 있었다. 부족한 식량은 대부분 미국의 농산물 원조로 충당했다.

     

토지면적을 표시하는 단위는 다양하다     

  토지면적을 표시함에 있어 다양한 단위가 적용되고 있기에 먼저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토지 면적을 측정하는 공식적인 단위는 미터법 기준인 m2, km2 등이다. 그러나 평(坪)이나 정보(町步) 등 전통적인 단위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미터법 기준에서도 km2나 m2 외에 ha(헥타르; 1ha=10,000m2), a(아르; 1a =100m2) 등 다양한 단위가 있다.

  평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자(1자≒30.303cm)인 면적으로서 미터법으로는 3.3058m2로 환산된다. 정보는 3,000평(9,917.4m2)이고, 정보의 1/10인 300평(991.8m2)을 단보(段步)라고 한다. 그리고 1/100정보(30평)를 무보(武步)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정보 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와 사용돼 온 토지면적 계량 단위다. 1km2는 100ha이고, 평수로는 30만2,500평이다. 그리고 1ha는 1.0083정보다.

  농경지의 경우 마지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 마지기는 종자(씨) 한 말을 식부할 수 있는 면적을 의미한다. 논의 경우 150∼300평, 밭은 100평 정도다. 한 섬과 한 되의 종자가 식부 가능한 섬지기 및 되지기란 면적 단위도 있다.

     

농지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됐다     

  농지개혁은 경작자가 농경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하에, 소작을 근절하기 위한 토지정책으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추진됐다. 첫째, 해방 후 일본인이 소유했던 26만2,502정보의 귀속농지를 조속히 처리해야 했다. 둘째, 1946년 3월에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무상몰수-무상배분 형태로 단행된 농지개혁이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됨에 따라 미 군정과 남한의 정치세력은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셋째, 지주와 소작인 간 예속관계를 탈피하고, 소작요율을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는 한편, 자경하게 되면 농민들의 생산의욕 고취로 농업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농지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단행했다. 제1차 농지개혁은 1948년 4월 미 군정청에 의해 시행됐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를 미 군정청으로 귀속한 후 귀속농지만을 대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불하했다. 농가당 논과 밭을 합해 최대 2정보를 상한으로 매각하되 농지가격을 연간 농산물 생산량의 3배로 책정한 후 현물로 매년 생산량의 20%씩 15년간 분할 납부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1945년 10월 미 군정청은 지주에게 지불하는 소작요율을 소출의 1/3(33%)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군정법령으로 규정했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동안 통상의 소작요율이 1/2(50%)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낮아진 수준이다. 북한 지역의 경우도 농지는 무상으로 배분했으나 생산량의 30∼40% 정도를 현물세란 이름의 세금 형태로 징수했다.

  제2차 농지개혁은 정부 수립 후 제정된 「농지개혁법」을 통해 1950년 4월에 실시했다.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작 농지가 대상이었는데 모든 농가의 호당 농지소유 상한선을 3정보로 한정했다. 소작인이 지주에게 납부해야 하는 농지대금은 1차 때의 절반 수준인 연간 수확량의 150%로 책정하고, 5년에 걸쳐 매년 소출의 30%씩 현물로 지급토록 했다. 1차 농지개혁 시 불하된 귀속농지에도 2차 때와 동일한 매각조건을 변경 적용한다는 내용의 「귀속농지특별조치법」을 반포함으로써 농지대금을 낮추고(연 생산량의 300%→150%), 상환기간을 단축(15년→5년)하도록 조치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가능한 범위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시행하면서 수복지역(38도선 이북의 휴전선 이남인 종전 북한 지역)도 농지개혁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1951년 말 현재 자작지 면적은 전체 농경지의 92%인 180만정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농민들의 이탈로 임차지(소작지)의 면적은 다시 늘어나게 됐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는 우리 경제에 큰 축을 담당했다     

  미국은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에 농산물을 원조해 왔다. 특히 1954년에는 공법 480호(PL480)를 제정하여 잉여농산물을 구호용으로 공여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1945년부터 1981년까지 PL480과 원조기관인 UNKRA, AID 등을 통해 약 30억달러에 달하는 농산물을 지원받았다. 규모면에서 인도와 이집트에 이은 3위의 미국 농산물 원조 대상국이었다.

  잉여농산물 판매대금은 정부 재정자금으로 활용했다. 이를 대충자금(對充資金; counterpart fund)이라 하는데 주로 국방비로 사용했다. 매년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대충자금의 비중은 20∼40%였으며, 1961년의 경우는 48%에 달했다. 그러나 값싼 미국 잉여농산물이 도입됨에 따라 일부 곡물의 국내 생산량은 감소하기도 했다. 소맥의 경우 소비량 대비 국내 생산량의 비중이 1950년 96%에서 1965년에는 38%로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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