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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Aug 09. 2019

막걸리와 파전, 언제부터 먹었을까?

다양한 모습을 가졌던 근대 막걸리의 역사

막걸리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을까?


다양했던 막걸리의 역사

한국인에게 가장 추억 어린 술이라고 하면 어떤 술일까? 어떤 이는 80년대 성행했던 호프집에서의 생맥주 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고된 노동이 끝나고 대폿집에서 한잔 들이켠 소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술과 다르게 토속적이며 고향으로 이어진 술이 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늘 동네 양조장에서 만들던 술. 막걸리다. 


막걸리는 2002년까지 지역 판매제한이라고 하여 그 동네서 만든 막걸리는 그 동네에서만 팔아야 했다. 남의 동네에서 만든 막걸리는 우리 동네에서 팔지 못했고, 우리 동네에서 만든 막걸리도 남의 동네에서 팔지 못했다. 

그래서 면단위마다 양조장이 있었고, 늘 동네 막걸리만 주로 소비했다. 

이것이 막걸리가 소주와 맥주와는 다른 우리 동네의 술, 그리고 고향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해진 이유다. 


무쇠판에 빈대떡(녹두전)을 지지는 모습.


비 오는 날 막걸리는 언제부터? 

막걸리는 비 오늘날 가장 많이 팔린다. 여름의 장마 때는 아예 대형마트에서는 아예 부침가루와 막걸리를 세트로 팔 정도다. 많은 이들이 언급하기로는 농번기에 비가 내리면 일손을 멈춰야 했고, 그래서 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휴식과 같은 술이 막걸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런 공식은 나왔을까?


'비가 오면 막걸리'라는 공식 기록은 1970년 9월 5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부터 보인다. 기사 명은 ' 땀 흘리는 한국인, 적도림 개발과  望郷(망향)'으로 적도 부근의 정글을 개척하던 한국인 노동자들 이야기다. 모진 육체노동에 늘 힘들어했지만, 비 오는 날 만큼은 일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일에 쫓겨 덮어두었던 고향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는 것. 이럴 때면 한국인끼리 둘러앉아 막걸리 이야기 등 고향에 대한 회포를 나눴다고 한다. 결국, 막걸리는 고향의 술이라는 것. 그리고 추억 속에 숨겨진 기억이 막걸리를 불렀던 것이고, 이것은 단순한 해외 파견 노동자뿐만이 아닌, 서울로 상경해서 일을 하던 수많은 노동자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이었다. 건축붐이 불던 70, 80년도에는 수많은 건축 노동자들은 비가 오면 일손을 놔야 했고, 고향생각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노동주인 막걸리로 손이 갔다. 결국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라는 공식은 60년 대 이후에 생겼으며, 70년 대 건축붐이 불면서 붐이 불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1933년 설립된 신평 양조장의 모습. 자세히 보면 자전거 위에 막걸리를 담은 참나무통이 보인다. 사진 신평 양조장


파전과 막걸리는 언제부터?

엄밀히 따지면 파전과 막걸리는 70년대 이후 생긴 용어다. 원래 파전보다는 빈대떡이 좀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 돼지기름에 지진 음식으로 기름과 고기가 부족했던 시절 상당한 고급 요리였다. 기록을 보면 1930년대부터 빈대떡집이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생기고, 이곳에서 팥죽, 국수, 그리고 소주와 막걸리를 함께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이전에는 너무 귀한 요리라서 막걸리와 궁합은 생각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다. 즉, 막걸리와 빈대떡이라는 공식은 1930년 대 이후로 보는 것이 맞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빈대떡에 들어가는 녹두가 숙취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것. 그래서 궁중에서는 녹두를 넣어 누룩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녹두빈대떡은 다음 날 숙취까지 생각해서 먹는 음식인 것이다. 


파전이라는 메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70년대 이후라고 본다. 이유는 파전 등에 사용되는 식용유가 60년대만 하더라도 고급 선물세트에 들어갈 정도로 고가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또 50년대만 하더라도 밀가루 선물세트도 있을 정도로 지금처럼 흔한 곡물도 아니었다. 파전이라는 단어 자체만 본다면 80년 대초에 부산 동래파전이 알려지고, 전국의 민속주점에서 사용하면서 전국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막걸리와 파전의 진정한 궁합은?

막걸리가 파전, 녹두전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이야기다. 특히 비 내리는 소리와 파전 굽는 소리가 비슷해서 더욱 막걸리가 그리워진다는 이야기는 애주가라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막걸리는 파전의 소화를 돕는다는 것. 막걸리 속의 누룩은 전분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는데, 분해하는 주요 전분 중 하나가 바로 밀가루이기 때문이다. 밥에 비해 소화가 잘 안 되는 밀가루 음식에는 막걸리는 천연 소화제 역할을 했고, 이러한 궁합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이다. 


초기의 양조장에서는 목통에 막걸리를 담았다.  출처 완주 술 박물관


막걸리도 오크통에 담았다고?

막걸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플라스틱 말통에 담아 사발로 마셨다는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의외로 이 플라스틱 말통은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게 된다. 1969년, 정부는 위생을 위해 플라스틱 통으로 막걸리 용기를 바꾸라는 법령을 내린다. 당시 이 말통은 국세청의 검열을 거쳐 만들어졌고, 금성사라는 곳에서 입찰을 받아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목통이라고 불리는 나무통이었다. 충남 당진의 90년 역사를 가진 신평 양조장 2대 김용세 명인에 따르면 이 목통의 재질이 참나무 기도 했다는 것. 참나무는 서양에서 와인 및 위스키에 숙성시키는 나무 종류 중 하나다. 결국, 막걸리나 와인, 위스키 모두 나무통에 넣어 운반한 것은 같은 것이다. 


막걸리 플라스틱 말통. 출처 대강 양조장. 저렇게 실고 배달을 했다. 가장 추억 어린 스타일의 막걸리 용기

페트병의 등장, 쓰러지지 말라는 막걸리 홀더

지금 우리가 마시는 막걸리 페트병의 등장은 1970년대 후반이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조장에서는 도매라는 형태로 10~20L의 대용량으로 팔았는데, 이제 소비자가 보다 편하게 마실 수 있게 각각 개별 포장된 막걸리가 나온 것이다. 뚜껑은 부직포로 제작, 생막걸리 특유의 탄산이 빠져나올 수 있게 했고,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재질의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발효가 진행되면 병의 형태가 변형, 세워놓고 마시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것으로 등장한 것이 막걸리 홀더. 80년대 나온 이 막걸리 홀더는 잡는 분위기가 살짝 생맥주와도 유사한 느낌을 풍긴다. 

                                

막걸리 홀더. 내압이 약해서 금방 변형되는 막걸리 용기를 보완하고자 나온 제품이다. 출처 대강 양조장

잠깐 등장한 유리병 막걸리

막걸리가 대부분 페트병이라지만, 알고 보면 유리병으로 된 막걸리도 있었다. 80년 대 초반, 유리 공용병으로 만들어서 전국의 막걸리 양조장에 배포한 적이 있었다. 완벽한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맥주병과 같이 갈색으로 제작이 되었다. 하지만, 1, 2년만 사용되고 이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용된 막걸리 병 자체에 수거가 어려웠고, 그에 따른 재활용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플라스틱 말통으로 막걸리를 받아다가 판매하는 민속주점이 

꽤 많았다. 하지만, 플라스틱 말통이 재활용이 되고 그 가운데 위생적으로 문제가 되자, 정부는 2L 이하의 용기에 넣어서 판매할 것을 명한다. 한마디로 플라스틱 말통 판매가 금지된 것이다. 하지만 2014년 다시 2L 이상 10L 이하의 용기에 판매할 수 있게 제한을 푸는데, 그로 인해 최근에는 생맥주처럼 막걸리 서버까지 등장한다. 


80년대 잠시 등장했던 막걸리 유리병


내압병 등 진화하는 막걸리 

90년도에 들어서서 부직포를 사용하던 막걸리 페트병은 플라스틱 캡으로 바뀌고, 변형이 자주 일어나 자주 쓰러진 페트병을 대신해 내압병이 등장, 지속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플라스틱 페트병은 디자인에 한계가 있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이 병의 디자인이 더욱 발전, 오히려 한국에만 있는 막걸리 디자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막걸리 내압병을 사용한 복순도가. 아무리 탄산이 올라와도 병의 형태는 바뀌지 않는다. 출처 복순도가 홈페이지



신평 양조장 백련 막걸리 디자인. 

한국의 대표 지역 술 막걸리

막걸리는 한국의 성장과 함께 걸어왔다. 70년 대 고도성장기를 달리면서 총 주류 판매량의 75%에 육박하는 수치를 올리기도 했고, 기존의 술과는 달리 고향과 가족으로 이어지는 술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막걸리의 가치는 잊혀가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도심이 집중되고, 지역의 가치는 점점 잊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지역을 대표했던 술 막걸리가 있다. 그런 의미로 올여름, 국내로 휴가를 떠난다면, 그 도 동네 막걸리 맛을 꼭 보면 어떨까? 횡성 가서 한우 먹듯, 남도에 가서 한정식을 즐기듯이 그 지역의 술을 즐긴다면 자연스럽게 지역과 나와의 소통으로 이어질 것이다.



<1967년도 혼분식 장려를 위한 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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