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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Sep 02. 2019

제1차 세계대전, 위스키의 역사가 움직였다.

숨겨진 스카치 위스키의 또 다른 역사

세계 위스키 5대 국가라는 말이 있다. 전 세계에서 위스키를 가장 많이 만들고 있으며, 또 소비를 하는 국가다.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일본(진짜 언급하기 싫지만 일단 넣어는 놓는다)이다.

이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위스키는 바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일명 정통 스카치 위스키라고 불리는 라인에는 조니워커, 시바스 리갈과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와 글렌피딕, 발베니, 맥켈란 , 싱글톤 등 싱글몰트 위스키까지 다방면에 포진하고 있다. 전 세계 최고가 위스키 역시 60년 숙성의 스코틀랜드산 맥켈란으로 양과 질로 다른 국가의 위스키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스카치위스키는 이리도 유명해진 것일까?


<이전 위스키 글>

<제 1차 세계대전. 참호속의 미군>

위기와 찬스가 모두 함께 있던 제1차 세계대전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주류 시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유는 전쟁을 계기로 음주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증폭하던 시기였고, 게다가 술을 만들기 위한 곡물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914년 당시 위스키를 만들던 증류소는 133 곳. 다음 해에는 20곳이 폐업을 하게 된다. 이후에는 연속식 증류기만을 통한 공업용 알코올만 제조가 허가되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86곳. 위스키 산업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기였다.


하지만, 여기에 기회가 하나 온다. 바로 수출이었다. 영국 정부가 외화 벌이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연합국으로 독일과 싸우던 미군에게 적극적인 수출을 진행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당시, 미국의 경우 중립을 선언했지만, 계속되는 독일의 해상봉쇄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때, 1915년,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가던 호화 여객선 루지타니아호(Lusitania)가 독일의 U보트의 어뢰에 격침되고 만다. 이에 미국인 128명이 죽게 되고, 이후 미국은 참전을 결정한다. 이때 수십만 명의 미군이 유럽전선으로 오게 되는데, 이 미군들에게 스카치위스키를 적극 판매한 것이다.  

그리고 수십만의 미군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는 전장에서 이 위스키 맛을 기억했다.



<제 1차 세계대전 기념 한정판 위스키>


아이리쉬 위스키는 왜 버벅되었나?

당시 미국으로 가장 많이 수출을 하던 위스키는 스카치 위스키가 아니었다. 바로 아일랜드산 위스키, 즉 아이리쉬 위스키였다. 그런데, 여기서 아일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였다. 유명한 1916년 부활절 봉기다. 아일랜드를 점령하면 대서양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항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 부활절 봉기는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지만, 결국 아일랜드 위스키는 미국 또는 미군으로 수출이 막혀버린다. 더군다나 아이리쉬 위스키는 스카치 위스키와는 달리 보리로만 만드는 몰트 위스키에 집중했던 시기. 먹을 것도 부족한 시절에 보리로 만든 몰트 위스키가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1920년부터는 미국에서 금주법생기고, 이전까지 수출했던 라인도 잃게 된다. 이후 1922년에는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는 영국이나 미국 편이 아닌, 중립을 표방, 결국 경제적으로는 우방(?)이었던 영국 시장조차 잃게 된다. 그렇게 아이리쉬 위스키는 위스키의 왕좌를 스카치 위스키에 내어준 채,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가게 된다.



한국에 수입되는 대표적인 아이리쉬 위스키 제임슨. 현재 아일랜드는 위스키 증류소 역시 4~5곳 정도로 원조의 위치를 잃은 상황이다.


스카치위스키가 3년 숙성을 법제화한 이유는?

스카치위스키의 가장 큰 특성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3년 이상의 숙성일 것이다. 스카치 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은 숙성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숙성을 하게 된 계기는 술에 세금을 붙이기 시작한 17~19세기 초,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으로 숨어 들어간 양조업자들은 위스키를 몰래 동굴 속에 숨겨 놓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에 다시 와보니 오크통에서 숙성된 술의 맛과 향이 훨씬 더 좋아진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위스키는 숙성을 가장 중시하게 되었다고 일반적으로는 알려져 있다.  기록상으로는 1860년, 숙성한 위스키와 비숙성 위스키를 혼합하여 판매한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스카치 위스키가 3년 숙성이라는 기준이 생긴 것은 이러한 배경과는 조금 무관하다. 이것 역시 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1915년 영국 정부는 위스키의 시장 유통량을 줄이기 위해 각 양조장에 2년 숙성을 의무화 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이것이 3년으로 늘어난다.  결국, 위스키 숙성에 대한 개념은 숙성이 특별해서 법률로 명기한 것이 아닌, 유통량을 줄이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숙성에 대한 표기사항은 이제 100년이 지났을 뿐이다.                           


곡물이면 다 위스키를 만들 수 있다. 연속식 증류기의 발명

혹자는 1826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스테인이 발명한 연속식 증류기가 스카치위스키의 변영을 이끌었다고 이야기한다. 보리로만 만들어야 했던 스카치 위스키가 이 연속식 증류기의 발명으로 옥수수, 귀리, 감자 등 다양한 곡물로 순도 높은 알코올을 뽑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리가 아닌 다른 원료로 만든 위스키가 위스키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는 논쟁으로 1890년부터 1908년까지 치열한 지속적인 법정다툼도 있었지만, 결국 연속식 영국 법정에서는 보리로 만들지 않아도 위스키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위스키 블랜더들이 고품질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서는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의 블랜딩(혼합)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또 위스키 자체의 원가를 낮추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곡물로 만들 수 있게 허가해야 했다.


덕분에 옥수수, 쌀, 감자 등을 사용한 증류주 원액과 블랜딩한 블렌디드 위스키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아는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조니 워커 윈저, 임페리얼까지 모두 이쪽 계열이다. 현재 스코틀랜드의 블랜디드 위스키 수출 비율은 90% 전후. 이것도 원래 95%까지 올라갔지만 최근에 위스키의 다양화에 힘입어 싱글 몰트 위스키 등이 시장을 넓힌 것이다.


위스키 증류 및 숙성의 기술을 이끌어 낸 티쳐스 위스키. 증류주를 숙성할때 백탁현상(하얀 띄가 나오는 현상)을 정노 숙성을 통해 해결했다.


스카치 위스키의 번영

물론 스카치 위스키의 발전은 실은 이것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는 와인용 포도가 1860년대부터 필록셀라라는 전염병의 유행으로 사라지게 된 것, 그로 인해 와인을 증류해 만드는 브랜디가 생산 중단, 그 비게 된 증류주 시장을 위스키가 침투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산업혁명으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지방으로 철도가 놓여 물류 및 유통에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대영제국의 유통망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여기에 좋은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양조업자와 멋진 자연환경도 분명히 위스키 산업을 발전시킨 요인이다.


한마디로 스카치 위스키가 발전하게 된 요인은 한마디로 결국 준비한 자의 승리였다는 것.

우리가 우리 전통주 판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씩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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