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제 및 마케팅 분야의 주요 아이템 중 하나는'빅 블러(Big Blur)'일 것이다. '빅 블러(Big Blur)'란 업종간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 얼마 전까지는 업종 간 경계가 확실했다. 제조와 금융, 서비스 등은 분리된 산업이었다. 자동차는 자동차를 만들고,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곳은 해당 서비스만 했다. 하지만, 기술의 혁신 및 AI 산업이 커지면서 시장이 계속 달라지고 있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추가적인 공급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특히 금융과 분야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포털 사이트 중심으로 운영하던 네이버의 네이버 페이, 그리고 카카오 뱅크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전기차인 테슬라인 경우도 제조를 하지만 기능 콘텐츠 서비스도 진행 중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장은 IT 및 금용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류 업계에서도 이러한 '빅 블러(Big Blur)'현상을 보이고 있다. 주종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왼쪽부터 로란 레돔은 부사 중심, 붉은 색은 속빨간 사과, 진한 붉은 색은 캠밸 포도, 검은색은 청수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
맥주와 사과 와인의 중간. 프랑스 농부가 충주에서 만드는 사과 스파클링 와인 '레돔 시드르'
충주에서는 흥미로운 술이 하나 나오고 있다. 바로 프랑스 출신의 와인 전문가 도미네크 에어케 씨(51)와 소설가 신이현 씨(54)가 만드는 사과 발포주 '레돔 시드르'란 술이다. 레돔은 도미니크 씨의 애칭. '시드르(cidre)'는 사과 발포주라는 프랑스어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이다(cider)'의 어원이다. 혹자는 사과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말하지만 맛을 보면 맥주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도 한다. 발포성이 좋은 탄산감 때문이다.
레돔 와이너리의 모습.와이너리는 제조업체지만 전시, 체험, 그리고 갤러리의 문화복합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둘이 만난 것은 1997년. 소설가로 활동한 신이현 씨가 프랑스에서 거주하던 중, 알자스 지역 출신의 도미니크를 만났고, 때마침 와인에 관심이 많던 두 사람은 와이너리를 운영하고자 하는 꿈을 꿨다. 2003년 결혼한 그들은 이후 도미니크는 프랑스 농업학교에서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를 공부했고, 알자스의 와이너리에서 실무도 담당했다. 그리고 신이현 씨는 도미니크 씨에게 제안한다. 한국에서 와이너리를 하자고. 프랑스의 시골에서 작은 동양 여자로 늙어 죽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리고 2016년, 충주에 한 과수원을 빌려 시드르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최근에 1800평 규모의 농지를 구입했다.
부부가 충주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와이너리 운영에 충주만 한 곳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륙의 특성을 가진 만큼 자연재해도 적으며, 무엇보다 사과와 포도 모두 잘 되는 곳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와이너리에서는 복숭아가 잘 자라는 곳은 포도도 잘 자라는데, 충주는 이 복숭아 재배에도 적합한 환경이었다.
이곳의 특징은 일반적인 제조공정으로 술을 빚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내추럴 와인 스타일. 일반 와인에는 첨가되는 아황산은 물론, 술을 만드는데 필수인 효모균도 따로 넣지 않는다. 오직 사과껍질에 붙어 있는 효모가 사과의 당을 알코올로 바꿔주며 부산물로 나오는 Co2가 샴페인처럼 탄산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 제품은 발포성 제품으로 마치 샴페인과 같은 느낌을 그대로 준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농법에 있다. 바로 별자리를 보고 농사를 짓는 부분이다. '생명역동농업'이라는 방식으로 독일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구체화한 농법으로 농산물은 물론 땅도 함께 키운다는 것인데, 바로 별의 움직임에 맞추어 농사를 짓는다는 부분이다. 매해 별의 움직임에 맞춘 '파종 달력'이 발행되는데, 바로 태양과 달,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열두 개의 별자리의 움직임에 따라 우주의 파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생명역동농법>은 그 그 파동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식물들의 특성에 따라 분류한 방식이다.
도미니크 씨와 신이현 씨
농부는 별을 보며 노래는 부르는 사람
그래서 나무를 심거나 열매를 따거나, 사과를 착즙하고, 탱크를 세척하는 날에도 가능하면 열매에게 좋은 날에 일을 진행한다. 신이현 씨는 농부의 농(農) 자 역시 별 신(辰)과 가락 곡(曲) 자가 합쳐진 별을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결국 우주의 순리에 순응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이 레돔 시드르의 원료는 부사와 홍옥, 속 빨간 사과로, 부사의 달콤함과 시원한 맛, 홍옥과 속 빨간 사과가 가진 새콤함과 떫은맛을 두루 활용하여 복합적인 맛을 가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우리 전통주에서도 느껴지는 뭉근한 누룩향도 있다는 것. 마치 사과가 태어난 땅의 맛을 보여주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해당 와이너리는 다양한 포도 품종을 통해 한국 와인의 확장성을 키워나간다는 방침이다. 마치 충주를 리슬링 와인으로 유명한 알자스와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은 사과 품종이 너무 적어 보다 복합미가 있고 다양한 맛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내추럴 방식으로 만드는 만큼 알코올 도수가 효모의 상태와 사과의 당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확한 알코올 도수로 뽑아내야 하는 주세법의 규제로 난항을 겪을 때가 많다고 전했다.
호랑이배꼽 막걸리 양조장에서 촬영한 사진. 배꼽이 강조된 모습이다.
서양화가가 빚는 막걸리, 평택 호랑이 배꼽 막걸리
보통 막걸리를 만든다고 하면, 명인, 장인이 만든다고 생각을 한다.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고, 또 어릴 적 추억 속의 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의 막걸리는 조금 다르다. 바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 이계송 화백(72)이 만드는 술이다. 원래 이계송 화백은 한국 고유의 오방색을 바탕으로 한 빛과 선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것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지는 않는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안다면 그림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야 늘 예술의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호랑이 배꼽 양조장의 모습 들. 모든 제품에는 이계송 화백의 작품이 함께 있다.
이러한 그가 그의 고향인 평택에 막걸리 양조장을 세운 것은 약 10년 전. 늘 예술과 협업하는 와인의 모습을 보고, 한국의 막걸리에도 예술적 느낌을 넣어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선 좋은 막걸리를 만들고자 고향인 평택의 현미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100일 이상을 숙성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일본의 사케가 도정을 하면 할수록 가격이 높아지는데, 이곳의 제품은 오히려 그 반대를 추구했다. 쌀의 겉면에는 너무나도 좋은 영양과 맛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밥을 찌거나 삶는 것이 아닌 생쌀로 발효한다는 것. 일반적인 생쌀발효법은 문헌에 근거한 방법을 표방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마치 와인의 포도처럼 생과를 껍칠 채 발효하는 와인의 기법을 담은 것이다.
제품 디자인은 노란색을 대표색으로 정해서 진행했다. 노란색은 오방색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이다. 라벨은 민화에서 보여주는 애교 있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역시 이계송 화백의 작품이 들어가 있다. 제품명이 호랑이 배꼽인 이유는 평택의 지리적 위치가 호랑이의 단전에 위치하기 때문. 결국 평택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배꼽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사용했다.
이계송 화백(오른쪽)과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이혜인 씨
흥미로운 것은 청주가 주는 뭉근한 단아함과 현미가 주는 매끈함이 이 막걸리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배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 알고 보니 이계송 화백의 부친은 배 과수원을 운영했고, 그 맛과 향에 익숙한 나머지 막걸리에서 배의 향미를 추구했던 것이다.
새로운 고객층이 태어나는 시대
최근에 빅블러의 현상을 보면 제품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경쟁 범위 역시 달라지고 있다. 위스키에 소다를 넣어 맥주 대신에 마시기도 하며, 와인 등을 대신하여 다양한 전통주를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고급술은 수입주류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것은 우리 농산물의 가치가 아직도 덜 알려진 것이며, 이러한 것으로 한국 술은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높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빅 블러(Big Blur)' 현상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2류 신세를 면치 못하던 한국 술에게는 기회다. 특히 우리 농산물을 사용한 독특한 제품은 그동안 경쟁이라고 여기지 않던 고급 수입주류와 경쟁을 벌일만한 제품으로 발전되고 있다. 무엇보다 산업 간 경계가 초월이 되고, 경쟁 범위가 넓어지면서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새로운 고객층이 등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이것은 무릇 주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관심을 받지 못했던 모든 시장과 품목이 대상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뒤바뀌며 산업 간의 경쟁 범위가 모호해지는 지금, 알고 보면 위기는 기회라는 해묵은 표현이 생각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