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을 마주한 날

흔들리지 않는 나를 알아차린 순간

by soom lumi

삶에는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지 못하는 시절이 있다.


감정이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사소한 말에도 마음이 찢어지던 시기.

누구를 미워했는지도 잊었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도 흐릿해진 그 시간.


그 시절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조금은 괴물 같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살아내야 했던 것이다.


그 시절을 함께 스쳐간 누군가에게서

최근 연락이 왔다.

아무 말 없이 멀어졌던 사람이,

늦은 관심처럼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 마음은 어딘가 따뜻했다.

그 시절의 어두운 모습까지

덮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


그게 고마웠다.

누구도 꺼내주지 않았던 시절을

누군가가 조용히 꺼내 들여다봐준다는 건

그 자체로 위로였다.


하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받아줄 수도 있을까,

그때의 이어짐을 다시 꺼낼 수도 있을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고마움에 혼란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감정인지 아쉬움인지 모른 채,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고마움과 사랑은 다르다는 것.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같지 않다는 것.


그 마음을 미루거나 밀어내지 않았지만,

조용히 선을 그었다.


그 선 너머에는

지켜야 할 지금의 내가 있었으니까.


돌아보면,

마음이 고요했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였다.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감정.

흔들림 없이 내 중심을 지키는 느낌.


그건 한순간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심연을 통과하는 동안

수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조금씩 쌓여온 내면의 힘이었다.


심연을 지나온 사람은 안다.

어둠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서 있었던 날들이

결국, 가장 깊은 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예전의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지금의 나를 지켜주는 마음은

더없이 단단하고 소중하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안다.

그때의 나도 나였고,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을 품은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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