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지 않는 물
남자는 팔을 부여잡고 눈길을 걸었다. 꽃처럼 붉은 피가 피었다. 북풍이 남자를 떠밀었다. 쩌적- 크레바스가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오이먀콘(Oymyakon)에 가본 적 있었다. 추위는 익숙했지만 허전함이 남자를 괴롭혔다. 고통은 추위보다 가까웠다. 남자는 잃어버린 오른팔이 있던 자리를 만져보았다. 신경이 칼바람 소리를 내었다. 정수리에 땀이 찼다. 남자는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소리마저 얼어붙으면 몸은 더 느려질 거였다. 지평선이 구름 사이에 얼어붙었다. 동토층의 수증기도 정수리에 맺힌 땀 같았다. 그것도 팔을 잃었는지 몰랐다. 마취도 없이 어금니를 뺀 적이 있었다. 뜨거운 술과 장작이 연신 타들어가던 방이었다. 얼지 않는 물. 순록고기를 잘라주던 노인이 발음을 가르쳐주었다. 잘린 팔에서 자꾸 어금니가 빠졌다. 남자는 뒤를 보았다. 반쯤 잘려 나간 소매에 달라붙은 팔. 남자가 앞으로 몇 보 걸어가자, 다시 천천히 끌려왔다. 북풍이 남자를 떠밀었다. 얼지 않는 물. 옷을 다 벗은 남자는 풍덩 빠져버리기로 하였다.
고통은 인간을 완성한다. 태어날 때 웃으며 태어나는 아기는 없다. 삶은 고통으로 증명된다. 고통은 살아있을 때만 반복된다. 죽음이 안락한 것은 아무 고통이 없기 때문일까. 아주 작은 고통도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고통스러울 때 바라는 건 사실 고통이 없는 상태다. 그것은 행복과는 다르다. 인간은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다. 죽어갈 때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고통의 종결을 바랄 뿐이다. 후회와 연민은 고통의 부재를 열망한다. 우리는 고통스럽다가 고통스럽지 않다가 다시 고통스러움을 반복한다.
고통의 동반자는 침묵이다. 고통과 침묵. 저기 따라오는 것은 내 고통의 결과물이자 채 떨어져 나가지 못한 침묵의 흔적이다. 절단된 채 질질 끌려오는 나. 그것은 과거에 어디쯤 나와 헤어졌으나 헤어지지 못한 이름이다. 나는 오늘도 아프다. 사실 며칠 되었다. 이제는 고통이 없는 순간이 낯설다. 계속해서 욱신거리고 찌르는 감각의 반복은 사람의 신경을 크레바스처럼 만든다. 그 날카로운 신경 속에 나를 욱여넣고,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나는 완성된다. 무엇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시간과 고통은 서로를 배척하다가도 친밀하게 지낸다. 그러므로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름에 고통은 익숙해지거나 체념된다. 쩌적-
얼어붙은 동토를 걷는다. 언젠가는 장작이 타들어가는 따뜻한 카펫 위에도 서 있을 것이다. 아프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은 간다. 침묵과 고통도 함께다. 채 잘려 나가지 못한 내가 끌려오고 앞으로 풍덩 넘어질 때도 있다. 어쨌든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얼지 않는다. 얼지 않았다. 북풍이 나를 떠민다. 떨어진 것과 함께 나도 졸졸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