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축소된 초록색 들판 같은 녹음綠陰을 바람이 이리저리 헝클었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나는 어제 과음으로 몹시 피곤하였다. 앞사람이 천천히 걸었고 나는 음료를 사러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작은 꼬마가 털모자를 자기 턱까지 끌어내렸다. 옆에 친구와 얼굴을 가리며 장난을 놀았다. 편의점 문을 나가려는데 자꾸 앞사람이 길을 막았다.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정류장에는 집에 데려다준 그녀가 보였다. 그 앞에 자동차가 와 멈췄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내게 더 다정했더랬다. 하늘이 우르릉 하고 천둥이 울리더니 눈앞이 번쩍번쩍하였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니까
모든 불행의 얼굴은 복면을 쓰고 있다. 정체가 없다. 낙뢰를 맞듯 이유 없음이다.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답도 오답도 없다. 가끔 믿음이라는 건 신을 믿을 때나 쓰는 말인 것 같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감히 해당 사항이 없다. 인간은 동족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재미로 죽일 수 있다. 왜 죽이느냐? 그럴 수 있으니까. 어째서 강자는 약자를 짓밟는가?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니까. 그리고 그때 약자에게 있어 강자만큼 잔인한 존재가 또 있을까?
설렘이란 호르몬일 뿐이다.
쾌락이라는 건 끊을 수 없는 감정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설렘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나는 단언한다. 설렘이란 호르몬일 뿐이다. 그것은 미래의 약속도, 간절한 희생도, 상대에 대한 성찰도 없다. 거기에는 공허한 호르몬만 흐르고 있다. 설렘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건 쉽다. 마치 초콜릿을 영양제라고 속이는 것처럼. 그러나 그 달달함 속에 위험을 우리는 안다. 너무 약해서 모르는 척할 뿐. 언제나 인간의 대한 예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호르몬은 그런 것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죄라는 게 법전에만 명시되어 있는 건 아니다. 법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죄도 인간에게는 죄다. 책임을 다하지 않고 회피하려고만 하는 인간 유형도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이 행한 죄의 모든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직면하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죄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순간 자아 전체가 붕괴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비난은 자기 소멸이다.
왜 바람을 피웠느냐. 하는 질문에 '모든 건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상대방에게서 이유를 찾는다. ‘미래가 안 보여서’ , ‘내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돈이 없어서’ 등등. 그렇게 가해자는 피해자로 둔갑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사랑했던 이와의 이별을 정당화 할수는 없다. 안 된다. 아직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미워서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멈춰 말리고 싶다. 그럴 가치가 없다. 어떤 죄인은 가만히 놔둬야 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죄인은 벌을 받는다. 물론 지금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생에 걸쳐 최대한 지속적으로 그 벌이 갈 것을 안다.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