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도치의 특급환상시집
나는 내 방에 늘 앉던 의자에 앉았다. 소매를 걷고 주사기를 혈관에 밀어 넣었다. 나는 나쁜 피를 빼내야 했다. 다 뽑아낸 그것은 검붉은 지렁이 같았다. 조금 꿈틀대다가 죽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매일 최소 한 번씩 피를 빼내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 의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나는 이제 기억 따위 믿지 못하겠다. 주사기에 담긴 나쁜 피를 뜰에다 버리려고 나갔다. 앞뜰에는 이제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그런 것을 키울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나쁜 피를 빼내러 집 안 깊숙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자신들의 지렁이 같은 피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잠깐이라도 제정신이 되어보려고. 옆 집의 대문이 바람에 힘없이 열렸다가 아무도 나오지 않고 닫혔다. 옆 집에 누가 살았더라. 그 피를 빼내면 나는 단 몇 분 동안은 제정신이 돌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내 몸은 또 나쁜 피를 한 바가지나 만들어댔다. 나는 또 다 잊고 다 죽었다.
뜰 앞에 뜨거운 아스팔트에 진짜 지렁이가 몸을 꽈대고 있었다. 그것의 몸뚱이는 생생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뙤약볕에 괴로운 듯 몸을 꼬아대던 그것의 고통이 여기까지 전달되었다. 아마 내가 나쁜 피를 빼낸 지 얼마 안돼서 그런 것도 느꼈으리라. 지렁이는 금방 죽어버렸다. 내 나쁜 피 속 지렁이가 똬리를 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근데 저 지렁이가 어떻게 저기까지 간 거지? 방금 전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죽으려고 결정지어진 것처럼. 왜 하필 내 눈앞에서 간단히 죽은 거지? 그 지렁이도 나쁜 피처럼 하늘에서 뽑혀 버린 걸까. 그렇다면 거대한 주사기가 보여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거 보니 나쁜 피가 다시 돌고 있나 보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지렁이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조금 꿈틀 하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주사기 속 내 나쁜 피와 지렁이를 번갈아 보다가 그것들이 사실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것을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댔다. 이것이 저기로 갔고 저리고 간 그것이 죽어버린 거구나. 멍해지는 머리로 생각을 마친 나는 지렁이를 뜰 구석에 썩은 나뭇잎 위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너무 늦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나쁜 피가 돌았는지 조금 지나자 나는 그런 것 따위 생각도 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저 나쁜 피를 뽑아내고 싶었다
나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며칠 전 비가 오고 난 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가는 지렁이를 보았다. 나는 통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정말 지렁이가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어떻게 거기까지 기어갔는지도 모르겠는데 너무나 멀쩡한 몸을 해가지고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급한 통화 중이어서 이것만 끊고 가서 살려줘야지 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 지렁이는 금세 죽어있었다. 살짝 건들자 움직여서 화단에 놓아주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지렁이가 내 눈앞에서 죽은 이유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을 들었다. 그런 엉뚱한 상상이 시작되어 이 시를 쓰게 되었다. 마치 그 지렁이의 죽음이 누군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내던져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 안에 어떤 정제되지 못한 피 같은 게 계속 돌고 있다고 느낀다.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찌꺼기, 말이 아니라 말의 쓰레기 같은 것. 그것을 뽑아내지 않으면 어딘가 썩을 것 같아서 이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썩고 있는 걸지도. 나는 가끔, 내가 쓰는 문장이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주 드물게는, 이 문장을 내가 쓴 것도 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글은 내가 쓴 게 아니라, 그냥 피처럼 빠져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도 그랬다. 지렁이를 생각했다. 한 번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생물이다. 말랑하고 축축하다. 그러나 싫어한 적은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비 오는 날과 그 다음 날이면 지렁이는 어느 순간 그 장소에 있었다. 왜 죽으려고 기를 쓰고 밖으로 나오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았다. 그 알 수 없는 생명체는 내가 알 수 없는, 그러나 마땅히 알아야만 하는 고통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지렁이의 생사를 확인하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관찰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애정이고 관심이고 최소한의 인간성이다
햇볕 아래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다가 내 안에서도 뭔가 꿈틀거렸나 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나는 내 속에서 나쁜 피를 뽑아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아주 구체적으로. 어쩌면 나는 나쁜 피라는 말을 빌려서, 나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기억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사건도 없다. 그냥 피다. 뽑아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것.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잠깐 또렷했다. 지렁이와 피와 주사기와 나, 그런 것들이 마치 하나의 원으로 꿈틀거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심력에 의해 내가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다시 무력해졌다. 헷갈려졌다. 무의미해졌다. 이 시는 정리가 아니다. 그저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내미는 고통과 혼란이다. 나는 해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은 더 훌륭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한 번씩 내 안에서 무언가를 빼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것을 느끼는 당신이 수치스럽거나, 외로워하지 않게 나도 내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내게는 애정이고, 관심이고 최소한의 인간성이다. 내게는 언제나 그게 시였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 안에도 나쁜 피 한 방울쯤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당신도 한 번쯤 당신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뽑아내길 바란다. 그렇게 또렷한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그전과는 다른 무엇인가 꿈틀거리며 살아나가고 있다는 걸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