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손가락 사이로 흘러간 것들

슴도치의 특급환상시집

by 슴도치


우리는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대화는 처음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우리는 여러 번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럴 때마다 결론에 다다랐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새로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건 끝나지 않을 거야. 당신이 말했다. 나는 수긍했지만, 대화는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이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거기가 당신의 무덤 같았다.


대답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성냥으로 탑을 쌓았다. 매표성냥이라고 팔각으로 된 아주 옛날 성냥갑이었다. 성냥을 왕창 쏟아놓고 탑을 쌓았다. 그 탑은 곧 3층, 10층, 그리고 하늘에 가닿았다. 그때까지도 당신은 말이 없었다. 바람이 후- 불고 나는 어지럽게 무너진 성냥을 주워 담았다. 거기에는 다 말하지 못한 당신과 나의 낱말도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당신이 빙그르르- 돌며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나는 떨어지는 그 꽃잎이 아득하여서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말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고야 말았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 그렇게 당신을 애지중지하면서도 나는 내가 더 애지고 중지였나 보다. 다 떨어진 당신이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고 곧이어 흑흑 울 때도 나는 까마득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러고 한 오백 년은 지났을 무렵, 밖에서 꼬마 여자아이가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길게 소리를 질렀다. 대화는 그때마다 끊겼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아이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쯤 소리를 질렀을 때. 당신도 무슨 말인가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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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계속 말하게 될까


특별한 감정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최근에는 오히려 말이 너무 많아져서 문제였던 시간이었다. 반복되는 대화. 같은 결론.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말다툼. 그건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다 점점 깊이 가라앉는 일 같았다. 허우적거릴수록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돼버릴까 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말을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나를 상대에게 이해시키려고 말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말만으로는 결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어느 때는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 상대가 마음먹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더 많은 도움을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거나, 미친 척 춤을 춰보는 것도 차라리 긴 침묵과 날카로운 말보다 나을 수도 있다.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순간을 써보고 싶었다.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말들로 쌓은 성냥탑 같은 대화. 불도 붙이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버리는 감정의 구조물. 그래서 이 글은 대화에 대한 글이 아니다. 말해도 말해도 닿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다림의 관한 글이다. 말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기다려주는 일은 언제나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길이다.



당신의 명확한 대답이 있었더라면, 아니 나의 대답이 명확했더라면 우리의 침묵이 길어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와 당신의 말이 어지럽게 나뒹굴지도 않았을까. 언제나 다툼은 지겨운 대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 침묵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더욱 분노하게 만들 때도 있다. 하지만 과열된 것은 냉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나긴 침묵은 바깥에 아이가 의미 없이 질러대는 비명에 의해 간단히 깨진다. 우리는 조금 웃었고, 자신의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 것이다. 결국, 감정에는 휘발성이 있다. 당장 중요하다고 느꼈던 감정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신의 첫마디가 내 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냥 한 번 피식 웃었으면 좋았을 순간들. 천 마디의 말보다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살린다. 서로에게 있어 대화는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하다. 표현하지 않고 알아주길 바라는 것보다 무책임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대화가 너무 길어져도 우리는 애당초 무슨 말로 시작을 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진짜 중요한 감정의 전달은 몇 마디의 말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첫마디가 내 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도 당신에게 그럴 것이다. 그러니 되도록 따뜻하게 말하고 침묵과 다툼은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에게는 사랑할 시간도 빠듯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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