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그 여운에 대하여
머릿속에서 번개가 친다.
회오리가 불면
나는 이상한 나라에 가 있다.
번쩍번쩍하고
그 번개는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
또다시 번개가 치고 나는 땅에 떨어진 그것을 줍는다. 이곳저곳 꼬챙이처럼 꽂힌 번개를 주워 집으로 돌아간다. 이 집에서, 저 집에서 당신은 온종일 번개만 만들었다. 당신이 번개를 창문 밖으로 던지면 나는 그것을 주워다가 내 집에 쌓아두었다. 나는 번개를 먹고 마시고 번개와 잠을 잤다. 밤에는 매번 배가 아팠다. 회오리.
이상한 나라에서 당신은 나를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땅에 그을린 자국을 내려다본다.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번개를 오래 들고 있었다.
회오리회오리회오리
회오리회오리
회오리
가끔은 번개가 멈추고 배도 아프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것들이 차분해지는 순간. 그럴 때면 아무것도 소리치지 않았고 가만히 있었다. 회오리가 불어도 나는 어디로 가지 않고 다만 한가득 삼켜지기만 했다. 창문이 닫히고 그을린 자국이 다른 흙으로 덮여졌다. 우르릉. 하고 번개가 친 뒤에 오는 소리가 천천히 왔다.
나는 내 울음을
너무 오래 들고 있었다.
앉았다가 일어서는데
외투 주머니에서 번개가
후드득 흙 위로 떨어지는 때도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아직은 번쩍번쩍했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표현을 잘 알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아플까 하는 생각. 그러나 실제로 아파보면 마음이 심장 언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언저리가 저릿저릿하게 아프면서 온몸에 피가 돌 듯이 고통이 불처럼 옮겨 붙는다. 어떤 것은 아프게 건드려져야 실존한다.
사람이 누군가와 헤어지며 느끼는 고통은 그 만남의 시간을 통해 결정된다. 가벼운 만남의 이별은 겨우 타박상 정도지만 오래 만난 연인과의 이별은 신체가 절단되는 고통이라고 한다. 주었던 몇 년 동안의 마음만큼 절단되는 것이니 아플 만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통을 줄여주는 약도 없다는 데 있다. 그 고통은 마취도 없이 온전히 감내해야 되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잠깐동안 그 고통이 멈출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뭐 어쩌라고’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꽤 괜찮아 보인다. 태풍은 계속 불고 있지만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회오리가 나를 이상한 나라에 데려다주는 느낌. 내 고통의 본질을 손으로 들고 있는 듯한 느낌. 괜찮아. 괜찮아. 근데 진짜 괜찮아?
욱신거리는 상처에 손을 올려보면 그 자리가 심장박동처럼 뛰고 있다. 번개가 치듯이 욱신거리는 상처는 만지기만 해도 찌릿하고, 아픈 것도 지겨우면 고통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된 거지? 하는 생각은 사치다. 진짜 아픈 사람은 고통을 애정한다. 애원한다. 애인이 된다. 괜찮다고 자신을 기만하기보다 그 고통에 솔직한 편이 더 낫다는 걸 진짜 아파본 사람은 알고 있다. 그렇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을 더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것을.
눈을 감으면 아직은 번쩍번쩍하다. 그러나 처음보다는 확실히 괜찮아졌다. 흉터는 남아도 상처는 결국 아문다. 우리가 고통을 견디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 끝났을 때 인간은 또 한 뼘 성장한다. 어쩌면 모든 만남과 이별은 성장통이 아닐까. 당신이 내게 준 고통을 원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조금 더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까.
번개가 친다. 그러나 진짜는 그 뒤에 오는 소리에 있다.
나는 내 울음을 너무 오래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