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공포, 그리고 선택
그 숲의 소문은 밤에 잃어버린 사람들의 수만큼 많았다. 나는 아침부터 울음과 맞닥뜨렸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울기만 했다. 그것은 둑에 불은 빗물 같았다. 아무리 쓸어 담아도 넘치고 마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숨 같은 물. 방앗간의 남자아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저녁 무렵에 들려왔다. 그때는 숲에 짐승도 얼씬거리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숨 같은 불을 켜고 아이 이름을 불렀다. 오늘 처음 그 이름을 안 이들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아이를 찾았다.
숲은 어두운 성벽처럼 굳건하게 문을 닫고 있었다. 저기 들어가면 죽어. 숲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노인이 말했다. 그 들숨과 날숨에도 그가 지난날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방앗간 사내가 고함을 치며 노인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뒤따르는 것을 사람들이 붙잡았다. 사내의 환한 횃불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저쪽에서 마치 숲이 잡아챈 것처럼 팍 하고 꺼졌다. 사람들이 숨을 참았다. 방앗간 여자가 아이 이름인지 사내 이름인지, 아니면 자기 이름인지 숨처럼 가쁜 것을 막 쏟아내며 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밤이 나무 사이로 흘렀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확실하지 않다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일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불가사의. 인간이 죽음을 무서워하는 건, 죽음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과 결과에 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상까지는 덤이다.
나는 늘 산과 숲, 그 어둠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 그 거대하고 깊은 어둠을 올려다 보노라보면, 그 시선이 별도 달도 없는 하늘로 연장되고, 나는 내 공포의 실체가 결국 인간의 미약함과 나약함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불확실성 앞에서 늘 별것 아니다.
그 감정을 운명이라는 개념까지 확장해 보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삶도 죽음도 가족도 친구도 결정할 수 없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이미 결정지어진 채 우리에게 온다. 마치 투수가 던진 공처럼. 기어코 받아내던가 어떻게든 받아치는 수밖에 없다. 구질을 결정할 수는 없어도 그 공의 마지막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살아있는 동안 늘 공포심을 느낄 것이다. 업무 상 실수도, 잘 나가는 친구도, 부모님의 병환도, 아내에게 들키는 비상금도,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직도 공포다. 하지만 공포가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공포를 이용해 왔다. 그리고 결국 그 공포를 이기고 더 나은 선택을 해왔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해 나간다. 어두운 숲으로 횃불을 향해 가든, 꺼이꺼이 울든, 숨을 참든 모든 선택은 선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인체는 산소, 탄소, 수소 등으로만이 아니라 선택의 연속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달라질 때 인간도 비로소 달라지는 것이다.
공포 앞에 무력하다면 우리는 빠져나갈 길 없는 숲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선택이 결국 나를 만든다는 걸 자각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내 안에 변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