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으로 남고 떠나지 않음으로 남고
무사는 여자의 따귀를 때렸다. 나풀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녀가 쓰러졌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주변이 불타고 있었다. 저택은 삽시간에 시체가 즐비했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것은 정원의 새로운 소품처럼 보였다. 시체의 정원. 병장기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었다. 가지 마세요. 여자가 무사에게 말했다. 대꾸도 없이 무사는 정문 쪽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들이닥칠지 몰랐다. 무사는 여자가 아직도 여기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무사의 사랑은 그녀의 도피 속에서 완성될 것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뿌옇게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무사도 한가득 잠긴 채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떠나지 않음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사는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사는 자신이 떠남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사가 한 발자국 걸음을 떼었을 때 그의 등으로 칼이 들어왔다. 무사는 배로 삐죽이 나온 칼등을 보았다. 칼등이 여자가 우는 박자에 맞춰 함께 울고 있었다. 무사가 여자 쪽으로 기울더니 쿵하고 그들은 뒤엉켜 쓰러졌다. 멀리서 보면 무척 사랑하는 연인끼리 껴안고 사랑을 나누는지 알았을 것이다.
칼이라는 도구는 늘 차갑고 섬뜩하다. 하지만 나는 칼등만은 좋았다. 칼몸 중에 유일하게 안도하며 만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은 칼처럼 보였다. 차갑고 섬뜩하다가도 때로는 안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혹은 안도하다가도 차갑고 섬뜩해지는 것. 이번에는 내가 손잡이를 잡고 다음에는 당신이 잡는 것. 번갈아 찌르고 대신 아파하는 것. 벨 수는 있어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것.
떠나지 않아서 남는 사람이 있고, 떠나서 남는 사람이 있다. 어쨌든 모든 인연은 남아진다. 그것은 물질적인 남음이 아니다. 마치 꽃가루가 손에 묻는 것처럼. 향이 남는 것처럼. 꽃잎은 떨어져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다시 피운다. 기억은 그 위에 켜켜이 덮이고 나빴던 기억은 좋아지고 좋았던 기억은 더 좋아진다. 그러므로 기억 속에 남음은 유리하다.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채로 남고 나도 그들에게 떠남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픔은 옅어지고 옅어진 만큼 새살이 돋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깊은 아픔은 흉터를 남긴다. 그 흉터는 볼 때마다 아리다. 그것은 부재의 고통이다. 고통이 부재함에 따라 고통은 고통이 된다.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주고 간 흉은 그가 떠난 뒤에도 흉으로 남다가 가상의 형形이 된다. 내가 준 흉도 그가 가져갔을 것이다. 그것을 보며 내 생각을 떠올릴까. 부디 덜 미운 기억이었으면 한다. 당신의 기억에도 내가 유리한 쪽이었으면 한다.
사랑에는 폭력이 수반한다.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 당신을 나로 만들기 위한 개조 작업.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함에 따른 찰과상, 타박상부터 배신과 기만의 응급 수술, 혼수상태, 사망까지. 크든 작든, 약하든 강하든 모든 사랑에는 정신적인 폭력이 동반한다. 그 폭력이 일시적일 수도 있고, 영구적일 수도 있고, 단발적일 수도, 지속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의 사랑이 서로에게 아무 폭력 없이 안착한다는 말은 반대로 그만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냈다는 말이다. 너무 물러서기만 하는 사랑은 안전하지만 그만큼 두 세계의 마지노선 또한 존재한다. 내게 있어 근본적인 사랑은 결국 다 내어주는 쪽이다.
칼등만큼의 안도감이라면
나는 언제든 찔리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귀로 속에 여전히 당신이 있었다.
사랑이란 서로를 베어가며 붙드는 일이고,
칼등은 끝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표면이다.
그리고 나는 그 표면이 끝내 사랑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