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재,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자꾸만 무언가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고, 배운 것들이 사라지면 다시 또 배우는 사이 내 마음에 헛헛함만 남은 걸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온 다음이었다. 그런데도 멈춰지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으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만 일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고 목표가 달성되면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일을 또 만들어 냈다. 결국 즐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목표에 매여 헉헉거리며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나에게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이라며, 똑같은 하루를 남들의 두 배만큼 열심히 산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이었을까.
내가 그리웠던 시간은 옥상 평상에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한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마당 잔디밭에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과자를 먹는 일, 내 방에서 혼자 무언가를 끼적이거나 비디오영화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는 일 등이었다.
특히 그리웠던 것은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 언제고 마음을 먹으면 모아놓은 돈을 들고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한 돈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는 기쁨을 누리던 나날들. 그때 만난 이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했으나 마음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다시 하기에는 여유가 많지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볼 새 없이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을 때까지 매일같이 아이들을 돌보고 챙기고 직장이며, 사람들이며, 매일 밥과 국과 반찬을 고민하면서 내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했으니까.
겨우 내 시간으로 주어지는 건 아이들이 잠든 후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마저도 밀린 빨래며, 설거지며, 반찬 준비 등으로 한참을 소비한 후에야 비로소)이 되어야 찾아왔다.
매일 피곤한 가운데서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내게 어떤 에너지를 주려고 아등바등한 것은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을까? 지금에 와서 후회되는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두가 힐링을 외칠 때 나는 성취를 통해 스스로 에너지를 채워 넣었으니까.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것은 사람으로 되지 않았으므로, 그 외의 것을 통해 보상을 받아야 했다.
정희재라는 작가를 이렇게 복잡다단한 날들을 보내던 중에 만났더랬다. 마음도 몸도 소란스럽던 나를 누그러뜨려 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라는 책. 사람의 근원적인 감정을 조곤조곤 다스려주는 그녀의 글에 매료되어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와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연달아 읽었다.
그 중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현재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이며,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라는 것. 행복은 발견의 문제이지 성취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현재 서 있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깨달음은 경이롭다.
작가가 처음 도시에 발을 디딘 날 100원을 주고 10원짜리 8개를 받는 장면을 읽으면서 오래 잊고 지냈던 어린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가끔 할머니를 뵈러 서울에 갈 때 비행기,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면서 나는 항상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무사히 할머니 댁에 닿기를 기도했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집을 찾아갈 수 없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도시가 주는 중압감과 당황스러움을 맛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다고 했을 때, 선뜻 지갑을 열어 차비를 빌려줄 만큼 나는 순진하고 거절조차 못 하는 아이였다. 아니 어리숙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표적이 되었으리라.
돌려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은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빌려주겠다고 뱉은 말을 다시 담을만한 영악함이 당시 내겐 없었다. 그 넓은 서울에서 내가 차비를 빌려준 사람이 며칠 뒤에도 여전히 다른 지하철역에서 같은 행위를 하는 현장을 우연히 보았을 때, 내가 느낀 배신감은 대단했다.
돈이 아까웠다기보다 인간의 진정성이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정희재의 글은 그 시절의 어리숙하고 당황스럽고, 모든 것이 어색하고 ‘지금의 나’ 같지 않았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말에서 정희재는 “한 개인이 도시라는 거대한 실체와 마주해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행복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길 바랐다.”라고 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묻고 답하는 것. 그것은 이미 선행되어야 했을 일이었으나, 나는 바쁘게 누군가를 따라가느라 요령만 배운 채 은근슬쩍 따라 하기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내 삶을 다시 되돌아 시작하게 만드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당시 그녀의 책을 읽은 뒤 오래도록 마음만 먹어왔던 일들을 해치웠다.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에 빠져 서로 눈을 마주하지 않고 고개만 파묻고 지내던 모습이 싫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인터넷과 텔레비전을 과감히 끊었다. 아이들은 잠시 금단현상에 빠져 머리에 열이 난다며 선풍기 바람을 쐬곤 했지만, 곧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내고 책을 읽으며 엄마·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여행계획을 세웠고, 덥석 예약도 했다. 돈이 아깝다고, 시간이 없다고, 아이가 어리다고, 휴가를 내기 어렵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미뤄왔던 일을 막상 저지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더랬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함께 떠났던 첫 해외여행은 뜻깊었다. 현실에 기댄 우리의 여행에 환상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함께 내가 예전에 즐겼던 것들을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내가 잃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 내 마음을 이미 충만하게 해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