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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척추가 빠져 있다

이언 매큐언, 『속죄』

by 겨울집

1998년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의 작가인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영국은 물론 미국, 독일 등 서구 문학계에서 대단히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스물일곱 살 때인 1975년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라는 소설집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언 매큐언은 1978년 두 번째 소설집 <이불속>과 장편소설 <시멘트 가든>을 발표하면서 강간과 수족 절단 등 엽기적인 이야기를 불온할 정도로 친밀감 있게 담담히 풀어나가는 작가로 알려졌다.


이후 <시간 속의 아이>, <낯선 자들의 위로>, <사랑의 신드롬>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그는 인간 내면에 숨은 본능으로서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언 매큐언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속죄>는 1940년 당시 활동했던 군인과 간호사들의 미출간 서신과 일기, 회고록 등을 참고해 쓰였다.


브리오니라는 소녀가 자신이 본 친언니 세실리아와 남자친구 로비의 모습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편견을 가지면서, 사촌 언니 롤라가 강간을 당하게 되자 당연히 로비가 한 짓이라 생각하고 무고한 사람을 파멸로 몰게 된다. 로비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대 진학을 앞둔 신분에 있어서는 가정부의 아들이었지만 미래가 창창한 사람이었다.


제1부에는 브리오니가 평생의 화두로 안고 갈 지울 수 없는 죄를 자신도 모르게 짓게 되는 과정, 제2부에는 브리오니의 행동으로 인해 감옥에 갔다가 전쟁터에 징발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 제3부에는 간호사가 되어 자신의 죄를 어떻게든 벌하려고 일부러 전쟁이 한창 중인 곳에 나가 병원에서 수련간호사로 일하며 애쓰는 과정, 마지막에는 60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망쳐버린 모든 이의 관계들에 대해 고백하는 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브리오니는 자신 스스로가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고백하고 죄를 고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러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평생을 붙들어왔던 죄책감을 보내려 한다.


그저 단 한 순간 다른 이의 상황을 멀리서 보고 끼어든 것이 그들 모두에게 끔찍한 불행을 불러일으키고 평생을 칼날 위에서 살게 하였다는 것.

브리오니는 이러한 감정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독백으로 담는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소설을 잡지사에 보냄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했던 건 아닐까?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 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449p)



브리오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출판사로 보냈는데, 스스로 잘못한 (거짓 증언)에 대해서는 쏙 빼고 소설을 보내자 편집자가 이 소설에서는 무언가가 빠졌다고 답장을 보내온다.

타인의 눈에도 명백하게 보이는 허점 때문에 브리오니는 더욱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까지-그 누구도 원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6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역자인 한정아에 의하면, 이언 매큐언은 9.11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직후 <가디언>지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타난 브리오니와 우리 친구 브리오니는 분명히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상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괴리.


오늘의 내가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과 자신의 경계 안에서 다른 모습을 지닌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실제적 행동의 범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 오래도록 주변을 맴돌 것 같다.


PS: 이 책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어톤먼트]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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