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을, 다시 일어서다
매일 4·3 희생자들의 명부를 보는 일을 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삶을 꿰어맞추고, 피해실태를 살피고, 그들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주기 위해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마지막을 들여다본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쩌다 이렇게 그들은 일상을 잃어버렸을까 아득해진다.
시신을 찾지 못해 행방불명이 된 이들, 엄청나게 쌓여 있는 시신 중에서 자기 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해 함께 헛무덤을 만들고 벌초를 한다는 글들을 읽다 보면, 4·3의 시간을 겨우 건너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영화의 그림책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은 4·3의 광풍에 희생당한 이들이나, 살아남은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저 “그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노랗고 조그만 씨.”라는 덤덤한 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영화가 말하는 그 땅이란 마을의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고 하여 ‘무등이왓’ 혹은 ‘무동이왓’이라 불리는 동광리의 마을이다. 약 3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인근 마을 중 가장 규모가 컸다.
4·3 당시 130여 호로 이루어진 이 평화롭던 중산간 농촌 마을은 1948년 11월 21일 토벌대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고, 마을이 전소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당시 동광리에서는 4·3으로 무동이왓에서 약 100명, 삼밭 구석에서 약 50명, 조수궤에서 6명이 희생됐다.
작가 김영화는 무등이왓에서 농사를 시작하기 전 제를 지냈다고 한다. 함지박에 흰 쌀밥을 담아 156개의 숟가락을 꽂고 술잔과 동구리를 올렸다고 하니 알고 있는 희생자 모두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들을 다시 불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곳에서 여러분의 삶을 이어 나가볼게요.’ 하는 다짐과도 같다.
희생된 영령들을 기억하며 숟가락을 꼽아 떠난 이들의 넋을 위무하는 행위는 그 어떤 대단한 이벤트보다 더욱더 감동적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매일 그들의 궤적을 잊지 않고 함께 살아나가는 것은 4·3으로 사라진 이 땅의 영혼들을 가장 크게 위로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페이지마다 그려진 그림들은 작가가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제주의 동료 예술가들, 동광마을 어르신들과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다해 4·3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술인,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빚으려 무등이왓에서 조 농사를 지으며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비로소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조와 메밀 농사를 짓고, 대를 엮던 마을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조 농사를 지으며, 몰아치는 태풍과 새들의 쪼임과 어쩔 수 없는 자연에 굴복한다. 그렇게 수확한 조를 모아 오메기떡을 만들고, 오메기술을 빚어 원래 이곳에 살던 이들에게 바친다. 하나하나 일기처럼 무덤덤하게 쓰인 글들은 마치 심장 한 곳에 쿵 쿵 쿵 하고 울림을 주듯 깊이 파고든다.
그들은 잃어버린 마을에서 그 마을의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 4·3 안내자의 설명도 듣는다.
피바람 몰아치던 미친 시절을 겪고, ‘4·3 안내자’가 되어 큰넓궤 앞에서 그 안에서의 나날을 이야기하기까지 홍춘호 삼춘은 얼마나 아득한 매일을 보냈을 것인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하루도 장담할 수 없었던 50여 일 동안, 파란 하늘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홍춘호 삼춘.
대학 시절 4·3 유적지 답사를 하려 큰넓궤를 간 적이 있다. 좁은 큰넓궤 입구 앞에서 나는 차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아득함 때문에 숨이 막혔다. 결국 일행들이 궤에 들어간 이후 나는 땅 위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어찌 그리도 힘들었을까. 어떤 연유도 없이 자신의 터전에서 밀려나야만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이 밤마다 꿈에 찾아온 적도 있다.
4·3은 끝이 났으나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의 일상은 과연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가. 그저 침묵하고 모른 척하고 외면하면서 그 시절의 기억을 뚝 떼어낸 채 살아야만 했을까.
다시 그날의 희생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모아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왔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곳을 살아가는 공간으로, 다시 이름을 찾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리라.
그들은 잃어버린 마을에 심폐소생술을 하며 숨을 불어넣듯, 농사를 짓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살아있는 공간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을 만들어갔다.
농사가 끝난 뒤에는 작은 음악회도 열고, 시 낭송도 한다. 누군가 대신 솎아져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미안해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에 다시금 감사하면서 ‘희생된 넋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들의 앞으로 행적이 궁금해진다.
수없이 많은 마을을 잃었다. 셀 수 없는 희생이 당시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희생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고 추구한다. 행복은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고, 살아가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묵묵하고 뚝심 있는 행위가 앞으로 우리 제주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줄지 기대된다.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이 잃어버린 마을을 하나하나 되찾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