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어떤 소설은 첫 장을 펼쳐 한 몇 줄을 읽었는데도 아주 오래전 묻어둔 기억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만났다면, 그 책은 오래오래 자주 다시 읽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회상의 시간을 자꾸만 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의 보편적 가치란 것이 누구에게나 통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 아주 사소한 일상의 문장 하나에서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이다. 사실 자극에 익숙해져 버린 요즘 사람들의 구미에 천천히 곱씹어야 하는 소설은 어울리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주변 상황에 따라 감동의 깊이나 그릇은 분명 다르다. 깊은 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시간에 읽은 책과 사람들이 떠드는 공중에서 읽은 책은 같은 책이어도 같은 책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주 희한한 것은 어떤 책을 읽던 순간들이 그 책과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지, 어떤 차를 마시고 있었지, 그날 누구랑 싸워서 기분이 별로였지 등과 같은 소소한 기억들이 책을 읽는 순간들과 겹쳐진다는 건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그저 텍스트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씩 겪게 되는 짧고도 긴 비어 있는 시간에 대해서 짚어내고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천천히 읽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를 소개하는 첫 줄은 “그가 어느 한 때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는 문장이다. 스무 살의 청년이 죽음만을 생각하는, 그 죽음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간다는 전제가 소설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때 죽음이라는 개념에 몰두하는 것은 인간의 발달단계 중 하나라고 이해된다. 그 시기가 누군가에겐 빨리 오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느리게 올 수도 있다. 청년기에 생각하는 죽음과 노년기에 생각하는 죽음은 같은 개념이긴 하나 결코 같은 것일 수가 없다. 하루키는 다양한 개념을 소설 속에 상징화해 우리에게 그러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대학교 2학년 무렵 자신과 한몸으로 느껴질 만큼 친밀한 네 명의 친구로부터 갑자기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라는 절교선언을 듣는다. 어떤 이유로 자신이 거절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수긍하고 떠난 뒤, 그 선언을 기점으로 쓰쿠루는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분리한다. 분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통증은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죽은 자신을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쓰쿠루는 이름에 색채가 들어있는 친구들과 달리 자신의 이름에 색채가 없다는 사실에서 그 친구들과 자신이 어울릴 수 없는 관계였다고 합리화한다. 이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친구들을 애써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색채가 없는 삶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평화로운 매일이 자신을 찌르는 지옥의 나날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사는 삶 속에서 ‘사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오래도록 타인과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던 쓰쿠루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그룹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실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하자, 사라는 그 친구들을 만나서 과거의 의문들을 해결하고 쓰쿠루가 과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사라를 통해 쓰쿠루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거대한 일상의 늪을 거둬내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연락도 없이 16년 만에 찾아간 쓰쿠루를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맞아준다. 그리곤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오’와 ‘아카’는 ‘시로’가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기에 그룹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 시로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쓰쿠루가 그럴만한 인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을 되돌릴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핀란드에서 살고 있는 ‘구로’ 또한 당시에 쓰쿠루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시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거짓말이 다른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덮쳤음에도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로 그 시절을 그냥 흘려버린다. 거짓말을 한 시로는 이미 살해당해 이 세상에 없다.
거짓과 진실이 시간 속에서 녹아내리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다섯 명이 만들어내던 완벽한 균형은 사라졌고, 뜨거운 무언가가 사라진 삶을 각자 견디며 살아내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 삶에 색채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 생겨났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은 아마도 출산이 아닐까 싶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은 매우 달라졌고, 되돌릴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한번 엄마라는 이름으로 새 인생을 부여받고 나면 취소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 사실 매우 두려웠었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보호해주어야 하는 존재로 역할하기엔 나는 너무나 부족했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내 삶의 일부로 뚜벅뚜벅 들어온 순간, 나는 내게 없던 색채가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하얀 웃음을 끊임없이 내게 보여주었고, 붉은 상처를 내내 달고 다녔고, 파란 옷을 고집하기도 했다. 빨간 블록을 붙들고 온종일 다니기도 하고 노란색 모자를 내게 씌워주겠다며 달려들기도 했다. 아이에게 설명하기 위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고, 검은 밤하늘의 달무리를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아이가 없던 시절엔 무채색이었던 삶이 아이를 통해 색깔을 되찾고 소리를 되찾았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각자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다. 맞닿고 부딪히고 따스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인정받는 것이 어쩌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삶의 정점을 향해 순례를 떠나듯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내 손에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잡혀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