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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집 May 07. 2023

지금의 아이들과 어떤 날의 아이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든 아이의 얼굴만 내내 동영상으로 찍은 적도 있었다. 30분 내내 아이의 영상에선 잠든 아이의 고운 숨소리와 가끔 비쭉거리는 입술, 눈을 찡긋거리는 속눈썹 정도의 변화가 있을 뿐. 남들이 보기엔 전혀 재미없는 아이의 얼굴을 그렇게 너무나도 신비롭게 쳐다보고 있었더랬다.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동영상 카메라를 들고, 아이의 얼굴만을 쳐다보면서. 어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기쁨을 주었던 아이. 그저 숨을 쉬고, 웃고, 밥을 먹고, 트림하고, 똥을 싸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이뻤다.


그때 찍은 아이의 영상 비디오는 비디오 테이프로 남아있지만, 그것을 틀어볼 비디오 플레이어는 처분한 지 오래다.      


언제부터 아이의 표정을, 눈빛을, 얼굴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을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내 아이만을 주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늘 그랬듯 그렇게 합리적인 변명을 덧붙여보지만,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건 아이들의 삶은 엄마의 그릇 안에 있다는 생각 때문. 사실 그 생각부터가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아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이고, 우리는 잘 품어 아이들을 날려 보내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데 날려 보내자니 아이들은 덜 컸고, 그저 지켜보자니 아이들은 내 품에서 안주한다.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까지 아직 먼 것은 알지만, 아이들의 어떤 독립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깨닫는 순간까지 우리의 선택을 종용하는 버튼은 이곳저곳에서 버저를 울린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책임은 나만의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골고루 책임져야 할 몫을 최근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예전 내가 초등학교 때에는 마을 새마을문고에서 시간표를 짜고 동네 아이들을 저녁마다 당시 학교 선생님이던 동네 분이 강의와 감독을 했다. 대학생 오빠들이 수학과 국어, 영어 수업을 저녁마다 해줬고, 아이들은 9시가 넘어서까지 선생님의 감시(?) 아래에서 자율학습을 해야만 했다. 공부하다 달아나면 선생님은 아이들의 집까지 찾아가 아이가 공부 시간에 빠졌다고 이르기도 했다.


그곳에 다니는 모든 아이의 집을 알 수 있었던 건 모두 한 마을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원 시스템이 활성화되기 전, 동네에서의 공부 시스템에서 나는 이미 어떤 보살핌은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쳤던 아이들은 이미 어떤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고, 우리를 열정으로 가르치던 선생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아주 오래전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 건 우리에게 전해 준 메시지가 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그 순간을 견뎌내면 그것이 자신의 미래를 지켜줄 원동력이 된다는 것. 


나는 그 수혜를 입고 자랐으면서, 아이들에겐 늘 이렇게 말한다.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기 싫으면, 네가 즐거운 걸 하고 살아. 오늘 맛있는 걸 먹고, 오늘 재밌게 살아. 많이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적당히 즐겁게 위험하지 않도록 안전하고 건강하게 학교에 다녀.   

  

실제로 아들은 나의 충고를 충실히 듣고, 늘 학교를 출석만 하고 돌아와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 게임에 매진 중이다. 내가 아이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인가라고 생각해보면, 아이의 어떤 생각이 차올랐을 때 비로소 함께 움직여줘도 상관없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찍 압박한 이들이 어느새 떨어져 나가듯이 정말 절실한 친구는 어느 날 자신이 원하는 길 앞에 서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아이들을 어떤 역할을 가진 아이들로 만들어낸다는 건 나의 몫일까. 

아이들은 자신만의 밥그릇은 타고 난다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지 않을까.

내가 걱정한다고 아이들의 삶이 과연 달라지나.

결국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 “내가 가출하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묻는 딸의 말에 “위험해지겠지”라고 말한 나의 대답은 위험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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