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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화동오로라 Nov 01. 2020

이상한 나라의 압구정


압구정 현대아파트


301번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오래된 아파트도 있구나 신기하다’ 정도만 보았을 뿐, 아파트 단지가 그렇게도 넓을 줄 생각도 못했다. 첫 수업 주소를 찾아 걸어가는데 넓은 단지에 나는 수업을 하기도 전에 지쳤다. 10월이었는데도 땀이 나서 겉옷을 펄럭 펄럭 흔들고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두 개의 검지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걸었다. 검색해보니 백화점 버스만 돌아다닐 뿐 마을버스는 커녕 버스도 한 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수원은 신도시여서 버스뿐 아니라 마을버스도 잘 되어있어 수업을 다니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자동차도 없을뿐더러 면허도 없다. 이 넓은 단지를 걸어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불평이 생겼다.


 세 자리, 요즘은 네 자리로 된 신축 아파트도 동도 많은데 두 자릿수 동 아파트가 생소했고 엘리베이터는 2,3층을 건너뛰고 4층부터 눌려진다는 것도 신기했다. 한 층에 10세대 12층이면 100세대가 넘는데 엘리베이터는 딱 하나라는 것은 좀 충격이었다. 택배들이 아파트 입구 바닥에 늘여져 있는 정리되지 않은 모습,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강남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도로 옆 인도는 울퉁불퉁하고 단지 내 상가들은 옛날 영화에서 봤을 법한 허름한 세트장 느낌. 하.. 이곳이 내가 앞으로 계속 다녀할 곳이라니! 팀장과 목소리 높여 싸우더라도 용산을 들어갔어야 했다며 또 후회를 하며 걸었다.


 압구정에서의 첫 수업.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모님이 아이 하원 시간이 되어서 데리러 가야 하니 잠깐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시고 황급히 나가셨다. 낡은 아파트 외관과 달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하나를 두고 밖과 안의 차이에 나는 소파에 앉아있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루시가 옷장 안 나니아 세계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랄까. 현관문 하나 차이로 안과 밖은 조명뿐 아니라 공기부터 달랐다.

 

 현관문 밖은 춥고 휑한 복도, 복도 창문은 옛날 창들로 여기저기 녹이 슬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삐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창문이 잘 열리지도 않는다. 복도 타일은 무늬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두 동강이나 세 동강으로 나뉜 것들도 있다. 계단이나 낮은 턱은 부식되어 부서진 것을 시멘트로 덧바른 자국도 있고 페인트 칠은 군데군데 벗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늦은 밤 복도를 오가다 배달 아저씨를 만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범죄 스릴러 영화가 떠오를만한 곳이다.


 그런데 현관문 안, 집의 내부는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홍대 라이즈 호텔,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지만 압구정 내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주황색 아늑한 조명과 햇살이 조화를 이루었고 넓은 평수인데도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깨끗한 나무 바닥, 벽면에는 미술작품과 조형들이 걸려 있고 나무와 생화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왠지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부엌은 대리석 바닥에 대리석 식탁, 식탁 정 중앙에는 맑고 투명한 꽃병에 생화가 가지런히 꽂혀있었고 조명은 등 하나로 딸깍 켜지는 게 아니라 천장의 반을 차지하는 등을 달아놓아 예술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부엌에서라면 2천 원짜리 김밥 한 줄도 2만 원짜리 고급 요리로 둔갑이 가능할 정도다. 이모님이 아이와 같이 집으로 들어오셨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 방에 들어가 수업을 시작했지만 아이 방 작은 소품과 가구에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하얀 나무침대에 아기자기한 토끼무늬 이불보와 배게, 넓은 창밖으로 초록나무들이 한눈에 보이고 창문을 반쯤 가린 연본홍 커튼, 창문 아래에는 낮은 수납을 두어서 장난감이나 인형을 보관하고 수납장 위는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귀엽고 예뻤던 방. 예쁜 방과 달리 수연이는 오빠가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나 제스처도 크고 웃긴 표정 짓기, 장난치기를 좋아했는데 서슴없는 모습에 어쩐지 나는 마음이 갔고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수업이 끝났고 다음 주에 만나자, 인사하고 현관문을 닫고 돌아섰다. 문을 닫으니 다시 휑한 복도.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루시처럼 나도 현관문 하나로 압구정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온 듯했다. 초호화, 최신식 아파트 단지의 수업이었다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데서 사는구나 감흥이 없었을 텐데 압구정은 외부와 내부의  차이로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 다녀온 듯한 마법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은 번쩍번쩍 외제차들의 향연, 아파트 단지  1 상점에 즐비한 부동산의 아파트 매매가를 보며  채에  십억이 넘는 빨간 숫자들. 기술까지 접목한 스마트한 아파트가 쏟아지고 지하 주차장에 깔끔한 외관, 다양한 커뮤니티까지 갖춘 신축 아파트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토록 오랜 아파트에 이렇게나 비싼 아파트라니.


내 예상과 상상이 모두 빗나가는 곳, 여기는 압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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