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학부모였고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택시를 자주 탔다. 말이나 행동도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간단한 문자를 보내는데도 두 세번은 수정해서 보냈다. 학부모님이 ‘10분 정도 늦을 것 같은데..’ 라며 수업시간을 늦추거나 다른 날 수업 요청을 해왔을 때도 싫은 내색 없이 최대한 맞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회사 시스템과 학부모의 실책이 합쳐 내 잘못이 아닌데도 학부모의 불만사항을 머리를 조아리며 듣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이지만 긴장되는 수업이 있는 날은 나도 모르게 퇴근길이 더 힘들고 지쳤다.
일주일동안 많은수업이 있다. 모든 수업이 그랬다면 나는 1년도 안되어 진작 회사를 때려치웠을 수도 있겠지만 감사하게 대부분은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 고마운 학부모님 덕에 10년 이상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감사)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퍼붓는 세찬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다 가리는 날, 분명 우산을 쓰고 있는데도 옷이 다 젖는 이상한 날이다. 비가 오는 것도 불편하지만 긴 장화와 백팩이 젖지 않게 걷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신경 쓰이는 수업도 있다. (....집에 정말 가고 싶은 날이다ㅠ)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다. 내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고 운전석에서 잘 갖춰 입은 중년 남성이 장우산을 들고 내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뒷좌석 문을 여는데 여자아이가 내렸다. 기사님이 있는 집도 있구나, 쓱 한번 돌아보고 늦으면 안 되니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올라가는데 ‘잠시만요’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린다. 아저씨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내가 수업 가는 집의 아이다. 방금 전까지 울상이 다 되었던 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젖은 옷과 백팩에 머리도 엉망이지만 “어머, 지연아!” 하며 자동으로 자본주의 웃음과 목소리가 나온다.
“아버님이세요?” (아닌 거 알고 있지만 확인차 물어본다)
“아니요, 기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짧은 사이, 우리 셋의 모습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였다. 셔츠와 바지, 구두로 잘 차려입은 젊은 기사님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매무새 단정은 물론 비 한 방울도 안 맞은 거 같은 ,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더워도 추워도 날씨와 상관없이 늘 예쁜 여자아이. 그 옆에 비에 젖은 생쥐 꼴, 나.
'띵' 소리와 함께 같은 층에서 지연이와 내가 내렸고 기사님은 현관에서 집 안 이모님께 아이를 인수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내려가셨다. 기사님이 있고 가사를 도와주는 이모님이 있고 아이도 봐주는 시터분이 있는 집. 뭐, 이모님과 시터분까지는 늘 봐왔지만 주차장부터 아파트 입구, 현관, 집안의 모습까지 영화처럼 지나가면서 이 아이의 일상도 그려지며 부. 럽. 다.. 기 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던 거 같다. 적응 할 만도 한데 압구정은 도무지 적응이 어렵다.
신혼인 우리는 남편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상을 차리고 디저트나 과일을 준비해놓는다. 오늘은 복숭아를 사 왔다며 냉장고에서 4개 1000원짜리 복숭아를 꺼낸다.
“이거 4개에 1000원에 사 왔어. 상태가 좋진 않지만 먹을 만해. 어때 잘했지?!”
“..........”
평소라면 ‘진짜?! 우리 남편 잘했네! 저녁 먹고 과일 먹자!’라고 했을 텐데 그날은 마음도 곱지 않으니 말도 곱지 않다. ‘아 짜증 나 짜증 나. 왜 이런 거 먹어야 해?! 그냥 제대로 된 거 사 먹으면 안 돼?!’ 라며 울기 직전이다. 오늘 여차저차 이랬고 저랬다며 이야기를 내놓았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저 놈의 복숭아를 당장에 가서 버려야지!! 복숭아, 너 이리 와! 복숭아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봐봐 지금 쓰레기통으로 간다 응?! ’라며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나를 웃겨버린다. 하루 종일 참아둔 눈물이 남편 앞에서 주르륵 날 것 같은데 너무 웃어서 나는 눈물이 되었다. 무거웠던 마음은 어느새 다 날아가 온데간데없이 여기저기 멍이 든 복숭아를 예쁘게 잘 깎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