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경력 1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학부모님과 수업 전 인사하는 오리엔테이션은 아직도 긴장이 된다. 평소와 달리 운동화보다 구두, 잠바보다 코트, 백팩보다 숄더백으로 첫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한다. 압구정 수업 3년 차, 어느새 적응이 되어 동 호수만 들어도 어디 위치해 있고 몇 평대 아파트인지 집 구조까지 그려진다. 이미 4명의 아이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익숙한 한강변 아파트. 문 앞에 쓰여 있는 호수를 다시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열리고 인사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학부모님과 인사하고 뒤이어 가사를 도와주시는 분과 아이를 돌봐주시는 시터 분과도 모두 인사를 한 뒤에 식탁에 앉아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앞으로 교육은 이렇게 진행될 거고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은 이렇고 몇 분 혹은 몇 시간 수업이 있고 교육비는 이렇게 됩니다’의 내용)
학부모님이 내용을 살펴보고 날짜를 쓰고 사인을 하는 사이 나는 집안을 둘러본다. 같은 구조임에도 오래된 아파트라 대부분 리모델링을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집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벽면으로 이루어진 화이트톤의 깔끔한 거실, 고급가구도 군데군데 보이고 아이 놀이기구와 장난감도 눈에 띄게 많다. 키즈카페를 방불케 하는 볼풀장과 트럼펠린이 있는데도 집이 넓어 전혀 좁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빈칸을 다 채웠는지 볼펜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서류를 들고 확인했다. 생년월일 19XX. 09. 19
- 어? 어머니, 아이 생년월일을 써 주셔야 해요.
- 아, 죄송해요 다시 쓸게요.
날짜를 보는 순간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눈이 동그라지게 놀랐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내가 태어난 생년월일이기도 했다. 같은 날 태어난 사람을 만나는 것 쉽지 않은데 속으로 이것도 참 인연이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40억을 호가하는 한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강남 아파트, 하얀 대리석 바닥에 곳곳에 눈에 띄는 고급 인테리어. 식탁 위에 올려진 영어신문과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부르는 ‘교수님’이라는 호칭. 마주 앉은 우리 두 사람의 모습에 “왕자와 거지” 동화책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건 왜일까.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 신기하다 정도로만 보았는데 오늘 내 감정이 난데없었다.생각해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공감대가 형성되고 좋아하게 되는 요인도 있지만 오히려 비슷한 사람이어서 더 의식하고 신경 쓰게 되기도 한다.
다음 주부터 수업을 하기로 했고 인사를 하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걷는데 나는 걷기를 그만두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신기하다 생각했을 뿐이고 내 처지가 슬프다거나 기분이 안 좋다거나 세상이 불공평하다거나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맞더라.위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내 발을 길거리에 묶어두어 오지도 가지고 못한 채 만들었다.
....... 꿈은 이루어진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들은 말들이 전부 다 거짓말인것 같았다. 나는 알고 보니 세상 밖에 있었고,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꿈을 이루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고 버거운 것이었다. 세상을 탓하기보다 내 노력과 재능을 탓하며 포기하며 순응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크고 단단한 바위라는 세상에 나는 깨기지 쉬운 계란이었구나 깨달았다. 바위를 뚫어보겠다고 마구 던져지며 깨졌던 내 지난 날들. 내 인생 전체가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네카페에서할머니들이하는이야기를우연히듣게됐다. 엿듣기보다커피숍이 작은 규모이기도하고할머니들목소리가크시니이어폰을꽂고있는데도저절로듣게되었다.아파트가몇채있으시고강남어디에건물주이신분들, 집에서일하는아줌마가어떻고,운전해주시는기사가어떻고, 또 건물청소아줌마는어떻고, 건물관리인은어떻고, 이건어제산옷이라며쇼핑백에서꺼내보이시는데구십만원, 백만원. 이야기 중간중간내평생들어보지못한몇백억의숫자들도오르내린다. 이어폰을꽂고책을읽고있었지만책은눈에들어오지않고옆테이블대화소리만들린다. 수다말미에는 ‘우리같은서민들을말이야,’ 하시며현재삶을만족하기보다더상위계층과비교하며현재의불만들을토로하고계셨다. (이분들이서민이라니.. 나는빈민이었나보다.)
빈부격차를넘어빈부격타 (빈부격차와현타의합성어, 빈부격차에서오는현실자각타임, 그날의나를표현하는가장적절한단어)를경험했다. 내가 TV에서봐온연예인이나 그동안 읽은책의작가들을보면대부분 ‘나는돈이없고가난했다며’슬프고아픈시절의가난을팔아댔다.아주구체적으로기록하고이야기하며독자나시청자들의공감을불러일으키곤이후부유해진삶에대해서는말을아끼거나짧게혹은언급하지않는경우가대부분이다. 가난을이용하여이익은다얻어누리고그이익에대해서는대부분함구한다.
없는사람들은뭐라도얻어내려이것도없고저것도없다떠들어대고, 있는사람들은자신의부를지키고싶어하기때문에지나치게말을아껴드러내지않는다. 그래서우리는세상에가난한 사람이많다고만생각했지부자가 이렇게 많은줄은몰랐던거다.
엘리베이터안에서이웃에사는중년여자분들이 인사를 한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으시고 어디 가세요?”
“그 집 어른 분은 건강하시죠?”
“........”
“........”
A아주머니께서 B아주머니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어보면 일반적인 대답은 ‘00가요.’ 이어야 할 텐데 그에 대한 답은 온데간데없고 B아주머니가 A아주머니께 다시 질문을 한다. 대답이 없는 질문만 오가는 인사. 이후 아무 말이 없는 아주머님 두 분과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한동안 정적 속에 있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층에 살고 있고, 우연히 봤으니 인사는 해야겠으니 건넨 말들이지만 이상한 인사법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또 지나치게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괜히 한 두 마디 한 것으로 동네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싫은 이유일 거다.
상위계층도더상위계층과비교하여엘리트계급과중산층계급이존재하고요즘은대한민국1%를넘어0.1%, 0.01%등으로계급을나누기바쁘다.하위계층은하위계층끼리도나누어더세분화해구분짓는다.가까운친구가어릴때 영세민아파트에서자랐다고했다. 초등학교가하나만있어일반아파트아이들과영세민아파트아이들이같은초등학교를다녔는데결국일반아파트의민원으로새로운초등학교를지어졌고기존초등학교는영세민아이들만다니는초등학교, 새로지은초등학교는일반아파트아이들이초등학교가되었다고했다. 일반아파트라고 해서 엄청비싼초호화아파트가아니다. 친구가자란동네는서울외곽으로다들어렵게사는동네라고했다.
아파트로 계층을 나누고
자동차로 계층을 나누고
남편의 직업으로 계층을 나누고
자식들의 성적으로 계층을 나눈다.
압구정에서도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선생님, 00동 들어가세요? 아파트 넓어요? 다른 애들은 학원 어디 다녀요?어머, 미국이나 영국으로도 유학이나 이민을 가요?” 하며 바로 옆 아파트인데도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신기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