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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화동오로라 Nov 01. 2020

좋겠다, 유치원 안 가잖아요.


기억에 남은 이모님이 있다. 언제 가도 집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수업준비도 꼼꼼히 잘해주셨다. 아이도 예뻐하고 하나하나 사랑으로 가르치시는 게 나도 느껴질 정도였는데 10년 동안 많은 이모님들을 봐왔지만 보기 드물게 좋은 분이셨다.

내게도 잘 대해주셨는데 철마다 과일 간식도 내주시고 시간이 없을 때는 비닐팩에 포장을 해서 내 가방을 열어 꼭 넣어주시면서 '끼니 거르면 안 된다, 잘 드시고 다녀야 한다'며 마음도 함께 넣어주셨다. 간식보다 이모님 마음에 힘든 수업일정에도 나는 늘 힘을 얻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지만 이모님과도 대화를 하다 보니 정보도 쌓인다. 신생아 때부터 봐왔던 조안이 가 어느덧 세 살이 되어서 유아학교에 들어갈 예정으로 한창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도 아기라며 어릴 때는 신나게 놀기만 하면 좋겠다고 너무 어린데 일찍부터 유아학교를 보낸다고 걱정을 하시며 뒤이어 조안이 방문 미술 선생님 이야기를 하셨다. 


"조안이 미술 선생님이 청담동 유치원에서 있으셨는데 거기는 재벌 몇 세 아이들도 와서 배운대요. 다섯 살 아이들이 아침부터 밤 8시 9시까지 공부를 하는데 잘하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겠죠. 한창 놀아야 할 나이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어디 쉬워요. 어느 날은 다섯 살 남자아이가 갑자기 안보이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당시에는 쉬쉬하는 분위기여서 넘어갔대요. 한 달 뒤인가 언어치료, 심리치료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요만한 애부터 공부 공부하는 거 정말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동네,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9시 늦은 수업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이모님이 문을 열어주셔서 집으로 들어섰는데  방 안에서 들리는 학부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다 풀 때까지 잠 못 잘 줄 알아! 이렇게 해서 A반 올라갈 수 있겠어?" 

 고등학생도 아니고 일곱 살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냉랭한 분위를 뚫고 방으로 들어갔다. 풀이 죽은 아이와 단 둘이 마주 앉았는데  또 공부하러 마주 앉은 내가 미안할 정도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율이, 준비한 수업을 잠시 미루고 아이가 원하는 만들기로 시작을 했다. 분위기를 바꿔보려 나는 목소리도 좀 커졌고 더 많이 웃었다. 중간중간 "괜찮아"말도 자주 했고 눈도 마주치며 마음이 나아지길 바라기도 했다. 한참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데 "선생님은 좋겠다, 유치원 안 가잖아요."  율이가 그날 수업에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지막이 뱉은 말이지만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많은 의미들로 내게 다가왔다.



출처 : pixabay


 일곱 살 율이는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압구정에서 초등 입학은 그야말로 대학입시를 방불케 한다.  국제학교, 사립학교 등 더 좋은 환경의 학교를 보내기 위해서 국제학교 과외 선생님이 있을 정도다. 영어유치원에 대치동으로 학원을 다니는 건 기본이고 학습지, 수학 과외, 영어 원어민 선생님 수업까지. 어느 때에는 아이들 일정이 더 많아 때로는 내가 아이들 일정에 맞춰야 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4세 아이들도 5세부터 압구정 유명 영어유치원을 들어가기 위해 과외를 받는다, 생각보다 많이. 

어린애를 뭐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나 생각이 들겠지만 유리의 할아버지는 병원장, 아빠는 의사, 아내이자 며느리인 엄마는 아이 교육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 경제력도 충분하고 살림은 이모님이 도맡아 하니 부족함 없는 완벽한 환경에 아이도 우수해야 한다는 강박, 나는 학부모님 입장도 이해한다. 


 율이 방은 침대방과 공부방, 두 개 방이 있다. 내가 매주 가는 곳은 공부방인데 "나도 여기서 공부하고 싶다. 여기서 공부하면 서울대도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어설 때부터 절로 드는 방이다. 큼직한 책상 옆에 간이로 움직이는 수업용 책상이 딸려 있고 필기도구와 문구류는 물론, 간식 바구니도 한편에  물, 비타민 음료, 쿠키가 매주 채워져 있다. 책은 책상 뒤편에 유명한 전집부터 아이가 흥미 있게 읽을만한 동화책, 만화책이 종류별로 있는데 서점의 아동코너를 옮겨놓은 것 같다. 

 바로 옆 침대방은 넓은 침대에 하얀 시트와 이불, 동물 인형이 한쪽 벽면에 줄을 맞춰 앉아있고 은은한 조명으로 옷장과 서랍장이 세트로 어우러져있다. 부족할 것 하나 없는 환경이다. 


"율이야 정말 좋겠다."

"뭐가 좋아요, 하나도 안 좋아요!" 


태어나면서 잘 갖춰진 환경이었던 율이는 그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완벽한 환경이 이들에게 때론 짐이 되기도 한다. 부족하게 컸던 우리들은 탓할 환경이라도 있다. "집이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어. 그럴 형편이 아니었지." 하며 도망가면 된다. 율이는 도망갈 곳이 없으니 결국 탓할 대상은 덩그러니 자기 자신밖에 남질 않는다. 



 가까이 아는 오빠가 대학병원 의사로 있다. 아내는 변호사고 처가가 서울 외곽 넓은 땅과 서울 근교 집이 몇 채씩 있어 부유하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어느덧 5년의 결혼생활 중이고 아이들도 예쁘고 아내와도 잘 지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고충이 있다며 " 아내가 좀 더 가난한 집 딸이었으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한다는 말이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2층 단독주택에 살고 아이들도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다 봐주고 집에 이모님도 있고 아내도 출중한 외모에 잘 나가는데 변호사인데 뭐가 불만이지 했었다. '가난한 집 딸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말, 요즘은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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