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야, 1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다음 주가 월급날인데 받는 대로 갚을게.’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 아니면 조카들을 하루 이틀 봐줄 수 있냐는 것, 선희가 미희에게 연락하는 건 둘 중 하나다. 25일쯤 돈을 빌렸다가 다음 달 10일쯤 갚는다. 한 달에 15일가량 무이자 단기대출을 받는 셈인데 미희는 단기간 빌려가고 갚을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번 달에 생각보다 카드 값이 많이 나와서’, ‘하준이 하은이 병원비랑 학원비가..’ 문자에서 전해지는 절실함에 결국 ‘알았어’ 답신 후 바로 송금한다. 어느 달에 미희가 현금이 여유가 없다고 하면 80만 원, 50만 원 금액을 줄여서라도 선희는 매달 돈을 빌려갔다.
미희는 직장인 5년 차이다. 월세와 생활비는 물론 매달 학자금 대출금도 갚고 있다. 오죽하면 동생에게 이런 부탁을 할까 싶어 6개월째 단기대출을 해주고 있다. 약속한 날짜에 돈을 돌려받기도 했지만 1주일이나 2주일 뒤에 받기도 했다. 미희는 독촉하기보다 선희가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그때 자연스럽게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아야지 생각을 했다. ‘만약 빌려준 돈을 못 받게 되면 100만 원쯤 언니에게 준 셈 쳐야지’ 하며. 선희는 두세 번에 나눠서라도 빌린 금액은 미희 통장으로 꼭 입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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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희와 정태는 10년 차 바이크 커플이다. 아, 오토바이는 한 대. 정태가 운전을 하고 미희는 정태 뒤에 앉는다. 전문용어로 탠덤. 18살부터 지금까지 무려 15년을 오토바이를 탔던 정태는 복잡한 도심에서 주차도 편하고 이동도 편한 오토바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 덕분에 데이트는 요일과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커피 마시러 경기도나 강원도를 가기도 하고 평일 저녁에도 산책을 하러 팔각정, 한강, 양평, 남한산성을 가는데 어느 날은 이 네 코스를 하루에 돌고 오기도 한다. 구불구불한 산을 오르고 내리는 애니메이션의 장면처럼 정태와 미희, 오토바이는 한 몸이 되어 이 산, 저 산을 자유롭게 넘어 다닌다.
요즘 주말 데이트 장소는 광교 호수공원이다. 미희의 큰언니 진희 부부가 얼마 전 이사한 곳이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앨리웨이 쇼핑몰의 다양한 상점과 이색적인 전시, 골목마다 음악이 흐르는 그곳을 미희가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밤에는 야경을 보며 호수 둘레 길을 걷는 것까지 서울에서 광교까지 오토바이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도 드라이브를 하기에 적당하다며 정태를 설득해 자주 찾고 있다. 자매 아니랄까 봐, 진희도 앨리웨이를 처음 방문 한 날, 마음에 들어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주말, 아파트 단지는 사람들이 늘 붐빈다. 카페가 그렇게 많은데도 자리가 없어서 매장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거의 없고 테이크아웃을 해서 집 가서 마시기도 한다. 테이크아웃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많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올라가 믹스커피나 드립커피를 마시거나 하는데 그래도 광교를 찾는 이유는 진희 부부와 미희 커플이 대화가 잘 통하고 공감되는 요소들이 많아 부쩍 친해졌기 때문이다.
6월 초, 매주 오갔던 광교를 미희 커플이 한 달 만에 찾았다. 아파트 단지 앞마당에 수십여 개 플리마켓이 펼쳐졌다. 그곳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평소보다 더욱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오토바이를 한쪽에 세우고 헬멧을 벗고 정태와 미희가 상점을 둘러본다. 안 그래도 더위를 많이 타는 정태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더 답답함을 느껴 겉옷을 벗고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미희도 좋아하는 광교에 오랜만에 왔다는 반가움에 설레었다가 많은 인파에 놀라고 당황해하고만 있었다.
" 아~ 사람 드럽게 많네! 여기 아파트에 연고 없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 그래!!"
정태도 자기가 하는 말이 유치하다는 걸 아는지 실실 웃으며 괜한 큰소리를 냈다. 거드름을 피우며 제스처도 과하고 큰데 멀리서 진희와 준석이 손을 흔드니 정태는 이내 태도가 돌변해서 곧장 달려가 ‘누나, 형님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한다. 미희는 그런 정태의 장난스러운 태도가 너무 웃겨 뒤따르며 웃다가도 언니와 형부를 만나자마자 아이처럼 투정이다. 오랜만에 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며 속상하다고.
동시에 언니와 형부의 옷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형부는 반팔에 반바지 슬리퍼, 언니는 반팔에 냉장고 바지에 슬리퍼. 심지어 언니 냉장고 바지 무릎에 구멍도 작게 뚫려있다. 주변 사람들은 화련한 색감의 옷과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하고 한껏 꾸몄는데 진희의 화장도 안 한 맨얼굴이 너무 대비되는 모습이다. 미희는 진희에게 '선크림 발랐어? 립스틱이라도 바르지!' 한마디 하려다 주변 사람들이야 이곳이 놀러 오는 곳이지만 언니와 형부는 집 앞이니 이 차림새가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안부를 간단히 묻고 바로 집으로 올라가려다 문구류나 소품 같은 걸 좋아하는 미희는 플리마켓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진희와 준석에게 구경하고 올라가자고 했고 넷이서 상점 구경에 나섰다. 미희와 진희는 "우아! 이거 봐.", "이거 예쁘다." 하며 한참을 둘러보는데도 구매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미희야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내가 사줄게."
"그래요 누나, 진희누나도 사고 싶으신 거 있으면 고르세요. 제가 사줄게요."
준석은 미희에게, 정태는 진희에게 사주겠다고 부추겨도 구경만 할 뿐 별 소득 없이 아파트로 올라갔다.
22층에 도착했고 현관을 지나 거실에 다다르자 벽 전체가 창으로 되어있어 호수와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정태는 매번 큰 소리로 오버를 한다.
"누나, 여긴 올 때마다 좋은데요? 역시 사람은 성공해야 돼. 미희야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서 꼭 성공하자!
"언니, 나 집 구경 좀 해도 돼?”
미희는 정태의 말에 씩 웃곤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침실과 옷방도 전체창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방마다 전체창이라니, 아파트는 답답할 것 같다는 미희의 고정관념을 바꿔주기도 했다. 방 하나는 없애고 거실의 분리공간으로 나뉘어 서재로 꾸몄다. 서재 벽면에 있는 책장은 칸들이 크고 널찍하다. 소설뿐 아니라 여행, 미술 등의 다양한 책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데도 위아래 여유 공간 때문인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고 여행에서 구입한 이색적인 기념품과 소품들도 어우러져 책장이 인테리어로 느껴지기도 했다. 서재 안쪽에는 준석이 쓰는 책상으로 보였는데 책상크기만큼 넓은 모니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형님! 이거 모니터예요? 와 정말 넓은데요? 저 이렇게 넓은 거 처음 봤어요."
"어.. 어. 그거 얼마 전에 샀어." 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진희를 한 번 쳐다본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모니터가 필요하세요?"
"뭐 작업할 때도 쓰고 게임할 때도 쓰고. 원래 모니터를 두 개 놓고 쓰다가 와이드로 바꿨어."
주방에서 차와 커피종류를 꺼내 정리를 하고 있던 준석은 정태가 있는 책상으로 오더니 이것저것을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와이드 모니터의 장점들을 설명했다. 진희는 냉장고에서 지난주에 주문한 찹쌀떡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꺼내 거실 테이블로 옮기며 물었다.
"너희 뭐 마실 거야? 차도 있고 커피도 있고."
“저희는 차가 좋을 거 같아요. 미희야 어때?"
"응 나도 좋아!"
진희는 전기포트에 바로 물을 끓였고 찬장에 있는 다기세트로 꺼내 거실 테이블로 옮겼다. 정태의 관심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거실 운동기구와 마시지 기기로 옮겨갔고 거실 소파 옆에 있는 전신마시지기 바디프렌즈와 세라젬, 눈 마사지 기기와 팔다리 부분 마사지 기기를 보며 "이런 것도 있어요? 세상 참 좋아졌네요."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준석도 그런 정태의 반응에 신이 났는지 "한번 해볼래?" 하면서 이것저것 틀어주며 정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마다하지 않은 정태는 바로 준석이 하라는 대로 누어 보았고 앉아 보았고 기기들을 작동해 보았다. '역시 성공해야 돼'라는 말도 중간중간 넣어가며 기기들을 신기해했다.
정태의 ‘성공해야 돼’라는 말에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진희와 준석에게 미희는 가족이지만 정태는 아직은 남이다. 남의 집이니 괜한 너스레를 떨며 진희와 준석을 치켜세워 기분을 좋게 하고 싶은 일종의 처세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정태는 아파트에 사는 게 공포스럽다고도 했고 닭장 같은 느낌이 들어 답답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여러 기기들에 대해서는 신기하다 생각할 뿐 갖고 싶거나 사고 싶거나 하는 마음도 사실 들지는 않았다.
“다들 와서 앉아, 차 마시게."
진희의 한 마디에 미희도 바로 거실로 와서 앉았고 눈 마사지기로 마사지 중이었던 정태도 바로 전원을 끄고 앉았다.
"보이차야, 소화도 잘 되고 다이어트에도 좋대. 준석이 요즘 자주 마셔."
진희가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부었고 처음 오려 나온 찻물로 찻잔을 씻으며 말했다.
"다이어트? 나도 요즘 살쪄서 빼야 하는데 형부 효과 좀 있어요?"
"마신 지 얼마 안 돼서 효과는 사실 잘 모르겠어. 이왕 마시는 거 그렇다니까 마셔보는 거지 뭐."
진희가 4개의 잔에 차를 따라 부었고 넷이서 일제히 잔을 들고 한 모금씩 마시며 또 일제히 잔을 내려놨다.
"누나 근데 이건 뭐예요?"
정태가 차 세트 옆 네모난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것도 먹어봐 찹쌀떡 아이스크림, 맛있어. 초코랑 딸기 맛이 있는데 나는 초코가 맛있더라. 초코가 몇 개 없네?" 진희가 상자 뚜껑을 열고 초코맛 2개 딸기맛 4개를 모두 꺼내놓았다.
"그럼 저는 초코 먹을게요. “
초콜릿과자나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하는 정태는 초코 맛을 얼른 하나 집어 들었다.
차를 홀짝이고 찹쌀떡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고 있는데 정태의 한 마디에로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나, 미희가 선희누나한테 돈 빌려줬대요."
"얼마?"
"100만 원이요 누나!"
미희는 예상치 못한 발설에 정태를 노려보았다. 정태도 미희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근데 한번 아니고 한 6개월 정도 계속이요."
"매달 100만 원 아니라 80만 원이나 50만 원 일 때도 있었어. 그리고 언니가 매달 잘 갚아"
미희는 찹쌀떡 아이스크림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끼어들었다. 정태가 또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미희가 정태의 다리를 툭툭 치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태는 내용 전달은 되었고 미희의 입장도 있고 하니 그만하기로 했다. 조용했던 진희가 말을 꺼냈다.
"네 돈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만 매달 돈을 빌려주는 게 선희를 도와주는 게 아니야. 봐봐라, 정해진 액수에서 한 달을 계획하고 소비해야 하는데 100만 원을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는 여유자금으로 생각하면 매달 과소비가 된다고. 과소비가 뭐 엄청 사치하고 낭비하는 게 아니라 버는 금액 그 이상을 쓰는 게 과소비잖아. 너한테 또 빌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소비가 안일해질 수 있다고.”
"맞죠 누나!! 미희한테 저도 몇 번 말했는데 안 들어요. 아직도 학자금 갚으면서 말이에요.”
정태는 그간의 답답함이 해소라도 된 듯 진희의 말에 큰소리로 반응했다. 정태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미희도 말을 이었다.
"언니도 카드 값 계속 줄이고 있다고 하고 외식도 줄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애들도 키우니까 나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은가 봐. 나도 언니에게 계속 빌려줄 수는 없다고 말했어."
진희는 찻잔에 차를 부으며 미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 준석이 말을 보탰다.
"나도 진희 말이 맞는 거 같아. 지난주 수요일인가? 선희도 수원에 사니까 평일 낮에 종종 집에 오는데 핸드폰이 바뀌었더라고. 진희는 00 전자 다니는데 한 번도 최신형 쓰는 걸 못 봤는데 선희 핸드폰은 늘 최신형이야. 그것도 기기 값만 한 100만 원 넘을 걸? 남편이랑 같이 바꿨대.
"진짜요 형부?"
"형님 진짜요?"
차를 마시던 진희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던 미희, 그리고 정태가 일제히 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