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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화동오로라 Aug 25. 2024

이해하려고 하지 마



 미희는 조카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광역버스를 타고 저녁시간도 되기 전에 서울로 일찍 귀가했다. 집에는 영희가 저녁을 준비 중이었고 저녁 먹고 오는 거 아니었냐며 왜 이렇게 일찍 오냐며 물었다. 미희는 다른 대답 없이 내 밥도 한 그릇 퍼달라며 식탁에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말이니 치킨을 시켜 먹자며 영희는 엉덩이를 씰룩대며 핸드폰을 찾았다. 


 “치킨은 반반 내자! 그리고 나 맥주도 마시고 싶은데 언니가 사다 주면 안 돼?”

 “나는 마시지도 않는 맥주를 내가 왜 사. 네가 마시고 싶은 면 네가 사다 마셔.”

 “나 지금 다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언니 아직 옷 안 갈아입었잖아.”

 “.........”

 “사다 줘어! 사다 줘 언니, 사다 주세용 미희언닝!”


  영희는 혼자 보내는 주말 저녁에 미희의 이른 귀가가 반가웠고 치킨을 시키니 당연히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다. 혼술이 아니라 같이 이야기할 상대도 있어 더 신이 났다. 

 “알았어. 편의점에서 4캔에 만원 그거 사다 주면 돼?”

 “아니! 오늘은 주말이니까 클라우드 뚱땡이 맥주 페트 있잖아. 그거 하나 사다 줘. 아! 아니다 두 개 사다 줘. 마시다가 더 마시고 싶으면 또 나가야 하니까. 미리 사둘래!” 

 “두 개는 너무 많지 않니? 하나만 사 올게!”

 “남으면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잖아!! 사다 줘 응? 사다 주라고 오!!”
 “너 맨날 하나만 먹는다면서 결국 두 개다 마시잖아. 하나만 사 온다.”

 “언니 두 개, 두 개 사다 줘” 하며 브이자를 보이더니 미희에게 두 손으로 카드를 건넸다.


 집 근처 편의점, 음료코너에서 영희가 이야기했던 맥주를 발견했고 냉장고의 문을 열어 페트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결국 하나 더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말이나 행동이 단호한 것 같지만 미희는 결국 영희가 원하는 걸 자주 들어준다. 오늘같이 맥주 심부름이나 물 심부름, 커피 심부름, 라면 심부름 같은 거. 


 ‘물 한잔만 가져다줘’ 말하면 ‘네가 가져다 마셔’  하지만 ‘언니가 가져다줘 나 침대에 누워서 자리 잡았단 말이야’ 하면 침대 앞까지 가져다준다. ‘언니가 타주는 커피가 맛있단 말이야’ 하면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믹스커피 2봉을 넣어 녹인 뒤 차가운 얼음을 가득 넣은 다방커피를 금세 만들어 주고 회식으로 숙취로 고생하는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라면 하나만 끓여줘’ 하면 ‘어이구 그러게 술을 왜 그렇게 마시냐고!’ 구박하다가도 부엌에서 보글보글 해장 라면을 끓여 차려 놓는다. 영희는 몸을 겨우 끌고 와서 식탁에 앉아 라면 국물을 들이키며 ‘어흐, 어흐’ 아저씨 같은 소리를 몇 번 내고 국물만 연신 들이켠다. 면발은 그대로 남긴 채 다 먹었다며 다시 몸을 끌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데 차리는 것도 치우는 것도 미희가 한다. 


 맥주 페트 두 개를 들고 온 미희를 보고 영희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상은 내가 차릴게” 말하고 핸드폰에서 ‘주말저녁 듣기 좋은 감성 팝송’ 노래 목록을 검색해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볼륨을 높인다. 전체 형광등 조명을 끄고 책상과 침대 주방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차례대로 하나씩 켠 다음, 냉장고에서 청포도와 블루베리를 꺼내 씻고 멜론 껍질을 깎고 썰어 접시에 담았다. 아이비 과자 봉지 두 개를 꺼내 또 다른 접시에 담았고 참치 카나페 캔을 뜯어 디저트 볼에 옮겨 놓는다. 

 

희가 준비하는 동안 미희는 샤워를 했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치킨이 배달되었고 영희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넓은 접시를 찬장 제일 위에서 까치발을 들고 꺼내선 치킨을 옮겨 담았다. 맥주잔을 모으는 게 취미인 영희는 오늘은 무슨 잔에다 마실지 찬장 문을 열고 조금 고민하더니 와인 잔 비슷한 스텔라 맥주잔을 두 개 꺼냈다. 영희는 스텔라 잔에 맥주를 따랐고 미희는 같이 배달 온 캔 사이다를 얼음을 넣어 마셨다. 

 저녁 대용이니 미희가 밥 한 공기를 퍼왔고 치킨을 반찬처럼 먹자고 했다. 늦어진 저녁시간에 미희와 영희는 배가 고팠고 한동안 말이 없이 밥과 치킨을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미희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 큰 숨을 한번 쉬며 ‘이제 좀 천천히 먹어야지’ 했다. 영희는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치킨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오른손에는 치킨 왼손에는 맥주잔을 든 채 ‘행복하다 행복해’ 했다. 

 미희는 오늘 있었던 일과 그간의 선희에 대한 이야기들을 영희에게 말을 할까 말까 조금 고민했다. 집에 오자마자 쏟아내고 싶었던 걸 여태까지 참다가 결국 말을 시작했다. 


 “영희 너, 선희언니 돈 빌려 주는 거 하지 마.” 


 영희는 왜 뜬금없이 돈 이야기를 꺼내는지 동그란 눈으로 미희를 쳐다보았다. 미희는 나도 매달 돈을 빌려주고 있었고 우리가 돈을 빌려 주는 게 오히려 선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정해진 액수에서 한 달을 계획하고 소비해야 하는데 100만 원, 200만 원을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는 여유자금으로 생각해 과소비가 된다고 그러다 보면 소비가 안일해질 수 있다고 진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듯 오늘 언니 만나고 왔는데 핸드폰도 바꾸고 스마트 워치도 샀다면서 우리한테는 애들 키우느라 돈이 많이 나간다더니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있다며 더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희는 핸드폰과 스마트워치에서 순간 미간이 구겨지긴 했지만 미희의 이야기를 다 듣고 생각이 정리된 듯 조용히 한 마디를 했다. 

 “언니, 나는 있잖아. 선희언니 보면 우리 엄마 같아.”
 뜬금없이 엄마가 왜 여기서 나오느냐고 미희도 미간을 구기며 되물으려 했지만 영희가 알아챈 듯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엄마도 우리 넷 키울 때 이모들한테 200만 원씩 500만 원씩 빌려서 키운 거래. 중고등학교 때 엄마가 우리 용돈 준거 있지? 그거 다 마이너스로 준 용돈이더라. 엄마가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인출기에서 뽑아 쓰라고 카드를 줬는데 그게 나중에 커서 보니 마이너스 통장에서 준거였어. 엄마한테 얼마 전에 물어봤더니 맞대. 이모들 아니었음 우리 이렇게도 못 살았을 거야. 나는 하준이 하은이가 꼭 우리 같고 선희언니가 꼭 우리 엄마 같아 언니. 나는 우리 엄마처럼 선희언니를 도와주고 싶고, 하준 하은이도 꼭 우리 같아서 도와주고 싶어. 언니는 언니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할게.” 

 “엄마는 이모들한테 돈 빌려서 최신핸드폰, 태블릿, 워치 이런 걸 산 게 아니잖아. 우리 키울 때 꼭 필요한 교육비나 생활비에 썼잖아. 애가 많았으니 빌려도 빌려도 부족해서 이모들 셋 돌아가면서 빌려달라고 한 거 나도 들었어.”


영희는 페트병에 남은 맥주를 잔에 다 따르고 한 모금 마신 뒤 약간 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두 볼은 이미 빨개졌고 술에 조금 취했다.  

 “선희언니는 뭐 좋은 핸드폰 쓰면 안 돼?! 돈 없어도 갖고 싶을 수 있잖아. 쓰고 싶을 수 있잖아. 언니도 학자금 대출 있지만 카페 가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오천 원짜리 커피 사 마시잖아. 그런 거랑 나는 비슷한 거 같아. 그리고! 우리 인도여행도 갔었잖아. 둘 다 학자금 대출 있었지만 2주 휴가 내고 몇 백만 원 쓰면서. 우리도 빚 있고 월세 사는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잖아. 지금도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고. 돈 없다고 빚 있다고 하고 싶은 거 안 하면서 살아야 해?! 난 선희언니도 좀 하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 핸드폰, 워치 뭐 그런 거라도 좀 있어야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버틸 힘이 생기나부지!”

 영희의 눈이 풀렸고 혀도 점점 꼬여갔다. 

 “나는 커피 마시고 싶다고, 인도여행 간다고 가족들한테 돈은 안 빌려 썼어.” 

 “언니는 그럼 돈 빌려 주지 마. 안 빌려 주면 되잖아. 안 그래?”

 술에 취해 있어도 맞는 말인 것 같아 미희는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희는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덥다며 입고 있는 잠옷바지와 티셔츠를 벗더니 메리야스 차림으로 식탁 위에 남은 과일들을 주워 먹었다. 식탁에 걸쳐 있는 팔꿈치가 자꾸만 식탁 바깥으로 나가는 바람에 몸 한쪽이 툭툭 떨어졌고 머리도 자꾸만 식탁을 쿵쿵 찧었다. 영희는 오늘도 씻고 자기에 글러 보였다. 맥주 두 페트를 결국 다 마시고 뻗은 영희는 식탁과 침대, 그 짧은 거리를 이리저리 비틀대더니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미희는 가끔 영희가 하는 말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리고 너무 맞는 말에 말문이 이렇게 자주 막힌다. 우리 집에서 제일 막내인데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 하나도 없다는 듯 말한다. 사람과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맨날 울기만 하면서. 자주 마시는 술인데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병원에 실려 가고 도로를 질주해 경찰차에 끌려가며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저렇게 마시면서.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영희는 메리야스도 뒤집어 입어 흰 태그가 나풀거린다. 미희는 나약하고 우스운 영희가 가끔 대단하고 기특해 보일 때가 있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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