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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화동오로라 Aug 10. 2024

오천만 원의 행방




 네 사람의 무르익은 대화만큼 저녁노을도 어느 새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금방 어두워지더니 주변 아파트와 건물 불빛이 하나 둘 켜졌고 거실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꽤나 근사했다. 정태는 어둑해진 밖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창으로 향했다.  미희도 따라 일어섰고 거실 창으로 가서 정태와 함께 야경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좋은 풍경이었다.


 더 늦기 전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준석의 말에 정태와 미희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진희는 두 개 남은 딸기맛 찹쌀떡 아이스크림을 미희에게 건네며 집에 가서 냉동실에 얼렸다가 먹으라고 지퍼백에 챙겨주었다. 오늘 너무 잘 있다가 간다는 정태의 씩씩한 인사에 진희와 준석도 웃으며 다음에 또 오라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이 좋겠다며 대략 날짜는 다음 달 셋째 주 주말로 정했고 현관문에서 간단히 인사했다.


 아파트 주변에 주차한 오토바이에 다다랐고 트렁크에서 헬멧을 꺼내며 정태가 물었다.

 “선희누나네 이번에 이사하면서 진희누나가 빌려준 오천만 원은 갚았지?”
  “... 아니, 아직 안 갚은 걸로 알고 있어,”
  “뭐?! 이사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안 갚았다고? 빌려준 건 거의 7년 정도 되지 않았나?”

 “응 그 정도 됐지 아마?”

 “에이 설마 갚았겠지. 그 돈도 안 갚고 이사했을라고. 다 정리하고 이사했겠지!”


 정태는 미희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의 돈이고 갚아야 할 돈이니 다 갚고 이사를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실례인 건 알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정태는 진희 누나에게 전화해서 한번 물어봐 줄 수 있냐고 미희에게 부탁했다. 미희는 간섭하는 느낌이 들어 굳이 전화까지 해서 물어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이 들다가도 정태의 반응에 미희도 궁금증이 앞섰다. 몰랐던 그간의 일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미희는 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러저러 이야기 끝에 진희의 대답도 미희 대답과 같았다. ‘아직 갚지 않았다.’ 정태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데, 특히 남의 돈은 더 무서운 법인데 네 식구가 단칸방에 월세를 살더라도 책임을 다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애써 덮어왔던 오천만 원의 행방을 들추었다.


 7년 전, 충주에 살던 선희가 남편 직장이 수원으로 옮겨지면서 급하게 집을 알아봐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전세자금이 부족했다. 동생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진희는 모른 척할 수 없었고 오천만 원을 빌려주기로 했다. 가족간의 거래이니 계약서 따위 필요 없이 진희는 선희에게 필요한 돈을 송금해 주었다. 전세자금이라고 하니 2년 혹은 4년 뒤에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라 생각했다. 선희는 거절하지 않고 진희가 주는 돈을 받고 남편 직장 근처 빌라를 알아보았다. 전세가와 매매가가 별 차이 없어 보였고 중개업자의 입김도 작용해 선희는 덜컥 방 3개에 화장실 2개, 30평대의 신축 빌라를 매매로 계약했다. 남편 명의로 받을 수 있는 대출을 최대한 받았고 아직은 아이가 없으니 둘이서 열심히 벌면 금방 갚아나갈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내 집’의 꿈을 진희가 빌려준 오천만 원이 도와준 셈이다. 선희의 매매 계약에 진희는 당황했지만 2년 최대 4년까지는 선희 말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이사하고 1년도 되지 않아 난임으로 고생이었던 선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시험관 시술도 몇 차례 진행했었고 두 번의 유산 경험도 있다. 이번 아이는 꼭 지키고 싶어 선희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임신한 10개월 동안 고위험 임산부로 응급실을 간 적도 있었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기간도 늘어났다. 선희의 임신으로 집안의 수입이 반으로 뚝 떨어지게 되었고 잦은 병원 신세로 계속 목돈이 나가게 되었다. 대출 이자도 한 달에 몇 십만 원씩 나가는 상황에 가계도 점점 빠듯하게 되었고 아이가 태어나서 가계 상황이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둘째도 생겼다.

 30평 신축 빌라의 대출 이자를 매달 갚기가 어려워 연체에 연체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첫째를 임신했을 당시 공장에서 알았던 필리핀 출신의 한 살 많은 언니를 통해 폰지사기를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주변 친구들에게 권했다가 선희 너 때문에 피해를 봤으니 대신 갚아내라며 고소장이 날아와 매달 몇 백 만원씩 지인들에게 갚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결국 선희네 부부는 지금 살고 있는 빌라를 팔고 건너편 오래되고 낡은 방 두 칸짜리 빌라로 이사를 결정했다.


 정태는 이 과정에서 진희에게 빌린 오천만 원을 갚고 이사를 가야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정태의 상식과는 다르게 선희는 진희에게 오천만 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이사를 진행했다. 진희는 15년 차 대기업 차장급으로 연봉도 높다. ‘먹고 죽으려도 없는’ 선희는 언니에 대한 미안함이나 체면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라며 가계상황에 온 힘을 써야 했고 이런 선희의 상황을 언니도 이해해 주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작은 빌라로 이사를 한 지 3년이 넘었고 오천만 원을 빌려준 지는 7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좀체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선희는 동생인 미희에게까지 매달 돈을 빌리고 있는 중이다.


*


 영희와 같이 살고 있는 집 앞에 도착했다.  미희는 정태와 인사를 나누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10평 남짓 분리형 원룸, 방 문을 열려고 하는데 영희의 통화소리가 들린다.

 “응, 언니, 지금 그럼 바로 보낼게. 80만 원이지? 다음 달 초에는 꼭 갚아야 돼,”

 방문을 열고 미희가 다짜고짜 영희에게 물었다.

 “선희언니야?”

 “응.”
  “너도 언니한테 돈 빌려줘?”

 “어, 언니가 요즘 좀 힘든가 봐. 매달 전화가 자꾸 오네.

 “얼마나?”

 “100만 원 빌려줄 때도 있고 보통은 한 7,80만 원 정도.”

침대에 앉아 사이드 테이블 위에 캔 맥주와 치킨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영희가 미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미희의 선희에 대한 연민이 이해되지 않음과 답답함으로 바뀌었던 날이. 온 가족이 그야말로 전화 한 통에 바로바로 대출, 무이자 가족론이다. 진희언니 말이 맞았을까, 돈을 빌려주는 게 선희언니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안일한 삶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말. 조카들도 어느 정도 컸고 어린이집에서 늦은 저녁까지 맡아주어 언니도 일을 나가게 시작했다. 남편 월급 250만 원 가지고도 네 식구가 먹고살고도 조금씩 저축까지 한다는 집도 있다던데 형부월급과 언니월급이면 못해도 400만 원은 넘는다. 매달 200만 원씩 왜 더 필요한 것인지 미희는 그날 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선희에게 전화를 걸어 복잡한 생각과 답답한 마음들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마음이 여린 선희에게 자칫 상처만 줄 것 같아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 달에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에는 앞으로는 빌려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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