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지 못하는 망각의 강
사랑할 때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고통스러웠다.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사랑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은 항상 그의 감정보다 더 많았고, 더 깊었고, 더 절실했다. 사랑의 비대칭은 언제나 한쪽을 무너뜨린다. 나는 그 무게를 혼자 견디며, 이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가 떠나고 나는 더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보고 싶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음에. 부재는 현존보다 더 무겁다. 시몽 베유는 말했다, “중력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지만, 은총만이 우리를 들어올린다”고. 그가 없는 세계는 은총이 사라진 순수한 중력의 공간이었다. 그의 빈자리가 그 어떤 현존보다 선명하게 내 일상을 침투했다. 커피를 마실 때, 길을 걸을 때, 잠들기 전 그 모든 순간에 그의 부재가 있었다. 나는 유령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게다가 이별 후의 고통은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의 고통이었다. 앞으로 영원히 그를 볼 수 없다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미래 시제의 불가능성. 모든 미래가 ‘그 없는 미래’로 확정되었을 때, 나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렸다.
그 모든 무게를 견디다 못해 그를 잊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말했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그것이 진정한 지옥”이라고. 망각이라는 지옥은 단순히 기억의 유실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숨 쉬는 그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함께 웃던 순간들, 손을 잡고 걷던 거리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의 떨림까지.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일. 그것은 내 존재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과 같았다. 베르그손이 말했듯 기억은 “과거의 현재적 생존”이다. 그를 지운다는 것은 또한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과거를 살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그를 내 안에서 완전히 지우는 지옥 대신, 차라리 덜 고통스러운 그리움이라는 연옥에 머물겠다고. 그리움은 아프지만,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준다. 망각은 너무 잔인하다. 그것은 그를 잃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사랑했던 나까지 함께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를 기억하는 나로 남고 싶었다. 완전한 회복보다는 불완전한 상처를, 무감각한 평온보다는 아픈 생동을 택했다. 그리움은 벌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 남아 있기 위한 마지막 방식이었다. 나는 차라리 끝나지 않는 아픔을 선택함으로써 그를 내 곁에 붙들어 둔다. 그리움은 나를 갉아먹는 통증이지만, 동시에 그가 내 안에 여전히 실존한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나는 지옥 같은 망각 대신, 지우는 일의 고통이 너무도 막대하여 이 애틋하고도 처절한 연옥에서 매일 그의 이름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