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눈동자
언어는 세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언어 너머의 실재에 대한 존중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표현 가능한 것만을 존재의 증명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내면의 언어가 외부로 번역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덜 실재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캉은 실재계를 상징계로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영역으로 정의했다. 언어는 항상 실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 뿐이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표일 뿐이다. 여기서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린다.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는 것, 즉 내면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기표를 내뱉는 행위를 뜻한다. 진짜 사랑, 진짜 슬픔, 진짜 고독은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맥박친다. 그렇다면 문제는 표현 불가능성이 아니라, 표현 가능한 것만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인식론적 폭력성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결코 온전한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심연이나 융의 원형은 기표라는 그물로 건져 올릴 수 없는 심연이다. 내면의 언어를 완벽히 표현해내야만 존재가 인정받는다면,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상실한 채 의식의 좁은 해안가만을 배회하게 될 것이다. 표현의 실패는 우리 내면이 그만큼 광대하다는 반증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경외다. 타인을 완벽히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관계를 망친다. 내면을 표현하지 못해 힘겨워하는 누군가를 마주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침묵의 무게를 함께 견뎌주는 일이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속에 그 사람의 가장 진실한 고통과 사랑이 숨 쉬고 있다
결국 문제는 정당성이 아니다. 표현되지 않은 내면을 부정하는 것은, 빛이 닿지 않는 심해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것들이 침묵 속에서 우리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이며, 표현 불가능성은 결핍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이다. 때로는 말을 잃은 자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는 가장 거대한 문장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