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애라는 무대 위에서 단독 주연을 맡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세계 또한 인식될 수 없기에, 자아는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 존재론적 확신이 타인의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독단으로 흐를 때, 인간은 고립된 섬으로 전락하고 만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만큼이나 거대한 타자의 우주가 실재함을 수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수용은 결코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의 불편함에 먼저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타인의 이야기는 대개 나의 이야기를 위한 배경으로 소비된다. 자신의 이기심을 당연한 진리로 착각하는 순간, 타인의 서사는 단순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워진다. 존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리쾨르는 인간을 서사적 존재라 불렀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이고, 타인이 타인인 것은 그가 살아온 이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덮어쓰는 행위이며, 그의 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다. 이것은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한 존재의 역사에 가하는 폭력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지닌 독립적 주인공이라는 인식, 그것이 들뢰즈가 말한 리좀(Rhizome)의 윤리적 의미이기도 하다. 중심도 위계도 없이 어디서든 연결되는 구조, 어떤 노드(Node)도 다른 노드보다 우월하지 않은 세계.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 스턴이 말한 상호주관성처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으면서도 연결될 수 있다. 타인에게도 나처럼 복잡한 내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복잡함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것. 이 불완전한 연결이 오히려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사회적 갈등의 대다수는 나라는 주체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그 환상을 내려놓는 일은 아름답기보다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할 때, 우리는 비로소 너그러운 관계로 들어 선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서 주연인 동시에 기꺼이 엑스트라가 되어야 한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자각은 자존감을 세우고, 내가 엑스트라라는 자각은 겸허함을 가르친다. 이 두 인식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얽히는 삶에 가까워진다. 사회는 그렇게, 각자의 서사를 가진 존재들이 리좀처럼 뒤엉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