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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Dec 26. 2021

[7주] 속옷까지 모두 벗으세요.

조산사는 말했다. 팬티 따위는 필요 없다고.

처음 조산원에 연락을 한지 약 3주가 지나고, 어느새 첫 초음파 진료일이 다가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그날의 사진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분위기의 날씨라고 보면 된다. 회색빛이 기본 값.


조산원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라 자전거보다는 걸어가기로 했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니 복도에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옆에는 잡지와 전단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림을 보아하니 분명 엄마와 아이, 임산부에 대한 내용이려니 싶었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내 이름이 불렸다. 남편과 나는 약간 긴장한 채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조산사 A는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 임신이 처음인지 등 간단한 정보를 확인하고 오늘의 방문 목적인 조기 초음파 검진(early ultrasound)을 위해 옆의 초음파 기계로 이동했다.


“오늘은 아직 배로 초음파는 못 보고 질초음파(vaginal ultrasound)로 진행할 거예요. 입고 오신 바지를 벗어 주세요.”


아, 맞다. 분명 메일에 그 이야기도 적혀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부인과 검진받던 기억이 나서 '탈의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했다. 조산사 A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여기에서 벗으세요.”
“여기서요? 아… 그럼 혹시 속옷은…”


말끝을 흐리자 조산사 A는 또다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It doesn’t help to see your baby. (아기를 보는 데 속옷은 필요 없어요.)”


그랬다. 이곳은 날씨만 좋으면 나체로 공원에서 선탠을 하는 유럽, 네덜란드였다. 한국처럼 어디 탈의실이나 핑크빛 가운 같은 걸 굳이 구비해 놓을 리가 없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주섬주섬 바지를 내리고 속옷까지 탈의한 다음에 진료 침대에 누웠다. 까만 화면에 빛이 반짝이더니 어둠 속에서 배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끽해야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배아일 텐데 화면에 꽉 찬 배아의 모습은 느낌이 남달랐다.


"심장이 아주 잘 뛰고 있네요."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여주면서 조산사 A는 다 좋다고, 정말 건강하다는 말로 우리를 다독였다.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 다른 의미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첫 초음파 이미지


방금까지도 진료실에 자리하던 어색함은 사라지고 지나 신기함만이 가득할 무렵, 조산사 A는 첫 초음파 진료를 끝냈다. 병원을 나오기 전 그녀는 웰컴 키트와 임신, 출산 관련 책자를 건네주면서 다시 한번 축하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책자와 초음파 사진, 그리고 각종 정부 안내 자료. 고양이와 강아지가 그려진 웰컴 키트 안에는 쪽쪽이 등 최소한의(?) 육아 맛보기 용품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으니 장도 좀 보고 집으로 들어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 이르지만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소식을 알렸다. 축하한다, 고맙다, 좋은 생각만 하라, 애썼다... 오고 가는 덕담 속에서 뱃속 생명의 존재가 또 한 번 조금씩 뚜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임신 사실을 안 다음 날부터 호르몬 영향 때문에 너무 감정 기복이 심하다던가, 미역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일기장에 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의 소소한 이야기.  


그렇지만 첫 초음파를 보고 난 그날 일기장에는 처음으로 뱃속의 세포에게 건네는 문장을 써내려 갔다. 


"아이고, 그저 잘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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