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며
누구나 잊지 못할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벌써 10년도 넘은 어느 아침이 그런 날이었다.
안경을 벗겠다고 라섹 수술을 받고 난 다음 날이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이니까, 살포시 눈을 떠 보니 익숙한 나의 작은 방과 하얀 벽지가 보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 분침, 초침까지 선명하게 보였던 그 순간, 나는 그 무언의 희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용히 시계를 바라보곤 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큰 의미가 없던 그 시계가 단순히 내 시력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매일 환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12월의 금요일 아침, 남편과 나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13주 차 산전검사를 위해 정밀 초음파 전문 기관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산전검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 바란다.
집 앞 조산사 사무실에서도 초음파는 볼 수 있지만, 외형적 기형(physical abnormality)을 상세히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밀 초음파 전문 기관으로 가야 한다. 물론 집 근처에 조산사 사무실이 이 기관을 겸하고 있다면 따로 예약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또한 이 13주 차 검사는 12주+3일에서 14주+3일 사이에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가고 싶은 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임신 주수 기간 예약이 다 차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예약이 가능하면서 보험에서 비용처리가 되는 곳을 찾다 보니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금요일 아침부터 움직이게 되었다.
대기실에서 안내문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초음파 선생님이 우리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가서 간단히 본인 확인을 하고, 자세한 의료 기록은 이미 이 기관에서 담당 조산사에게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 없이 바로 초음파 기계 옆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나는 10여 년 전 그날을 다시 맞이했다.
프로젝트 화면으로 아기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디가 코인지, 턱인지 제법 구분도 잘 되는 데다 몸속에서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아, 좋은 초음파 기계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전까지 언제나 조금씩 흐릿하게 보여서 온갖 상상력과 공간지각력을 동원했어야 했던 지난 초음파 검진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목 투명대도 2.3mm로 정상이고, 머리-엉덩이 길이도 7.2cm니까 아주 잘 자라고 있네요.”
그리고 초음파 선생님은 이곳저곳을 비춰가면서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팔다리, 손발은 다 잘 발달하고 있는지, 뇌는 예쁘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탯줄과 태반은 잘 자리를 잡았는지 등을 약 20분간 꼼꼼하게 검사했다.
“보세요, 아기가 손을 흔드네요. 기지개도 켜고요.”
그리고 조금 남은 시간 동안 초음파로 아이의 모습을 이리저리 볼 수 있었다.
너무 선명히 보이는 아기의 손과 손가락에 그 어느 영화나 드라마보다 몰입했다. 그 기분은 마치 맨 눈으로 그 작은 방 시계의 초침을 바라볼 때와 같았다. 아니, 실은 그 강도는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주 강렬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눈에 마음을 뺏기고, 급기야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른 서브웨이에서도 나는 계속 아기의 영상과 사진을 눈에서 뗄 수 없었다. 그런 남편은 날 보고 아주 신났다며 놀려댔지만 남편의 눈에서도 나와 같은 즐거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웃고 말았다.
이제 다음 초음파 진료는 약 6주 뒤에 예정되어 있다. 그때는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얼른 또 만나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약한 입덧을 이겨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