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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Jan 23. 2022

[13주] 뒤늦게 ‘덕통사고’를 당했다

너를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며

누구나 잊지 못할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벌써 10년도 넘은 어느 아침이 그런 날이었다.


안경을 벗겠다고 라섹 수술을 받고 난 다음 날이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이니까, 살포시 눈을 떠 보니 익숙한 나의 작은 방과 하얀 벽지가 보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 분침, 초침까지 선명하게 보였던 그 순간, 나는 그 무언의 희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용히 시계를 바라보곤 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큰 의미가 없던 그 시계가 단순히 내 시력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매일 환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12월의 금요일 아침, 남편과 나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13주 차 산전검사를 위해 정밀 초음파 전문 기관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산전검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 바란다.



집 앞 조산사 사무실에서도 초음파는 볼 수 있지만, 외형적 기형(physical abnormality)을 상세히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밀 초음파 전문 기관으로 가야 한다. 물론 집 근처에 조산사 사무실이 이 기관을 겸하고 있다면 따로 예약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또한 이 13주 차 검사는 12주+3일에서 14주+3일 사이에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가고 싶은 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임신 주수 기간 예약이 다 차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예약이 가능하면서 보험에서 비용처리가 되는 곳을 찾다 보니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금요일 아침부터 움직이게 되었다.


대기실. 책상에는 네덜란드어로 된 산모 잡지가 놓여져 있었다.
리셉션에서 준 13주차 검진 관련 안내문. 어지간한 곳에서는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된 문서들이 있어 굉장히 편리하다.


대기실에서 안내문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초음파 선생님이 우리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가서 간단히 본인 확인을 하고, 자세한 의료 기록은 이미 이 기관에서 담당 조산사에게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 없이 바로 초음파 기계 옆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나는 10여 년 전 그날을 다시 맞이했다.


프로젝트 화면으로 아기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디가 코인지, 턱인지 제법 구분도 잘 되는 데다 몸속에서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아, 좋은 초음파 기계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전까지 언제나 조금씩 흐릿하게 보여서 온갖 상상력과 공간지각력을 동원했어야 했던 지난 초음파 검진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목 투명대도 2.3mm로 정상이고, 머리-엉덩이 길이도 7.2cm니까 아주 잘 자라고 있네요.”


그리고 초음파 선생님은 이곳저곳을 비춰가면서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팔다리, 손발은 다 잘 발달하고 있는지, 뇌는 예쁘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탯줄과 태반은 잘 자리를 잡았는지 등을 약 20분간 꼼꼼하게 검사했다.


“보세요, 아기가 손을 흔드네요. 기지개도 켜고요.”


그리고 조금 남은 시간 동안 초음파로 아이의 모습을 이리저리 볼 수 있었다.

나의 최애 순간. 아주 능숙하게 다리를 꼬는데 이거 이거…

너무 선명히 보이는 아기의 손과 손가락에 그 어느 영화나 드라마보다 몰입했다. 그 기분은 마치 맨 눈으로 그 작은 방 시계의 초침을 바라볼 때와 같았다. 아니, 실은 그 강도는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주 강렬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눈에 마음을 뺏기고, 급기야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


며칠 뒤 육아 선배인 친구 J와의 카톡에서도 나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른 서브웨이에서도 나는 계속 아기의 영상과 사진을 눈에서 뗄 수 없었다. 그런 남편은 날 보고 아주 신났다며 놀려댔지만 남편의 눈에서도 나와 같은 즐거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웃고 말았다.




이제 다음 초음파 진료는  6 뒤에 예정되어 있다. 그때는  얼마나 자라 있을까, 얼른  만나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약한 입덧을 이겨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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