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수 Sep 24. 2020

퇴사 후 여행을 떠난 이유

도피였지만 삶의 방향을 찾아 돌아오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 집 안 구석마다 정리를 하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에서 가을 옷들을 꺼내 빨래를 해 햇빛과 바람을 쐬어 놓았다.


한 서랍장을 열어보니 그곳엔 여행 사진들이 가득했다. 나중에 실수로 사진 파일을 날려버려 미리 인화 해두길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사진들도 있었다. 사진 속 나는 어렸다. 비록 옷차림은 조금 촌스러울지 몰라도 풋풋한 내가 있었다. 이렇게 놔두다간 보지도 않고 언젠가 정리한다면서 버릴 것 같아 파일을 주문해 차근차근 정리했다.


사진들 옆에는 여행마다 사용했던 먼지가 쌓인 작은 노트가 한 권씩 꽂혀 있었다. 대부분의 노트는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을 나열한 일기장이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유난히 생각이 많이 적힌 것이 있었다. 바로 회사를 그만둔 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심란한 마음으로 다녀왔던 한 달간의 동유럽 여행 노트였다.



모아두었던 각종 표들



여행지를 즐기려고 즐겁게 떠난 보통의 휴가와는 다르게 그때의 여행은 도피와 비슷했다. 사춘기도 딱히 없이 지나온 나는 오히려 이 시기가 더 사춘기처럼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동안 "대학교 입학과 졸업 후 취업"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살아왔는데 그 시점에 회사를 그만두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꽤나 막막했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과 불안한 마음의 짐을 가득 안고 떠났다. 딱히 집에서 할 일도 없었고 일단 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어떤 답을 들고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한 달이라는 장기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마침 친한 언니가 유럽 여행 중이었는데 함께 하자며 제안을 해주었고, 또 왕복 비행기표가 57만 원밖에 하지 않았던 여행 비수기였으며, 숙소와 먹을 것을 고려해도 모아놓은 돈으로 충분했던 동유럽의 저렴한 물가 덕분이었다.



프라하



프라하, 부다페스트, 빈 이 세 도시를 큰 골자로 했고 각각 1주일씩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했다. 중간에는 살짝 계획을 변경해 근교 도시를 가지 않고, 베를린에도 다녀왔다.


꼭 관광지를 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걸어 돌아다니거나 카페나 풍경 좋은 곳에 앉아서 도란도란 떠들었다. 이 여행 스타일은 내가 여행 베테랑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부르는 동행한 언니의 방식이었다. 그동안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여행 전에는 계획을 짜고 그대로 따라 빡빡하게 움직이곤 했는데 이러한 평범한 여행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막상 이렇게 해보니 좋았다. 그리고 꼭 가야 할 관광지라고 했던 것을 보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행복함을 느끼니 내 생각만큼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한 아쉬움은 다음 여행을 위해 남겨둔다는 생각이 새롭게 생기기도 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서로의 생각에서 차이와 새로움을 느끼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이나 편견을 수정해 업데이트하는 과정을 겪기도 했다. 이 자리를 빌려 JY 언니 다시 한번 고마워!



프라하



여행은 그렇다. 현지의 사람들에게는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지만 내게는 낯선 여행지가 되어 제삼자로서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정확하게 어떤 경험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노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나 스스로를 칭찬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훅하고 들어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그 방향을 향해서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따라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층 더 성숙해졌기를 바라며, 나이 들기가 무섭지 않고, 올해엔 또 어떤 매력을 가진 내가 될지 기대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비 오는 날, 빈의 한 카페에서."


여행 기간 중에 꽤 마지막쯤의 글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접해보니 꼭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기대와 기준대로 행했던 것들도 한 발자국 멀리서 지켜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은 목표지향적으로 살다 보니 목표를 이룬 후에는 또 무얼 해야 하는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하나를 이룬 다음에는 게임 속의 보상과 같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또 흐를 뿐이었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조금 내려놓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많이 내려놓았나 싶기도 하지만)



부다페스트



그 외에 적힌 글에서는 이 여행을 통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면서 서로 원하는 바도 다르고 매일의 컨디션도 다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기숙사에 룸메이트와 살았던 적도 있지만 여행 메이트는 함께하는 시간이 한정되어있다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감정은 너무나 충동적인 것이어서 잠시만 한 숨 돌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뻐지는 게 스스로 한심하면서도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느끼게 된다."



여행 전에 충분히 서로의 여행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약간의 서운함이 생겼다. 이유는 굉장히 사소했던 것 같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였던 것 같다.(배고프면 예민해진다.) 결국엔 언젠가 저녁에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눈물의 화해를 했던 기억이 났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면서 길거리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4장짜리 즉석 사진도 찍어 남겼다. 지금 그 사진을 보니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기분이 상했고 이렇게 훌훌 털어놔버리면 아무렇지 않을걸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이런 글귀도 있다.


"혼자서는 당황스럽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함께 한다면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시너지 폭발!"


나는 길을 잘 찾지 못한다. 원래는 심각한 길치였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지도를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로는 틈틈이 지도를 보며 익혀와서 그래도 이제는 곧잘 찾고는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도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된 사람들에 비하면 확연히 느리다.


언니는 길을 잘 찾았고 맛있는 가게에 대한 느낌적인 레이더도 있었다. 대신 나는 누구나에게 쉽게 대화를 걸 수 있는 편이었다. 무언가를 물어볼 때에는 내가 앞에 서고, 길을 찾을 때에는 언니가 앞장서서 서로가 잘하는 부분을 맡으니 혼자 여행할 때보다 훨씬 편하고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되는구나. 여행을 하며 이미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결혼 후에도 남편과 그렇게 많이 다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한 때 나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이상형이기도 했는데, 나름 홀로 자유여행을 몇 번 떠났던 남편이랑은 첫 만남 자리에서부터 여행 이야기를 하며 공감대를 찾고 대화를 정말 많이 했다.





당분간은 여행하기가 어려워 과거를 회상하고 있지만, 시기가 괜찮아지고 상황이 된다면 또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여행 중에 꼭 즐거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만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내가 될 수 있어서 여행의 매력에 빠지는 것 같다. 결론은 여행 가고 싶어서 적는 글....!



작가의 이전글 안녕들 하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