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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Sep 29. 2022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아가씨




오전에 기 수련을 마치고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을 갈 때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극장이 있다는 것이 매번 고맙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긴 해도 그런 영화는 지하철로 10분 거리에 있는 다른 극장을 가면 되니 많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지근거리에 영화관이 있으니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어 나한테는 그저 그만이다.

모바일 티켓을 사용해서 곧바로 상영관이 있는 곳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 앞에 곱게 옷을 차려입은 두 할머니가 탔다. 연세가 꽤 있어 보였는데 정다운 두 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한 층을 더 올라가야 상영관이 있는데 중간층에 두 분이 내리시더니 출입문을 애써 열려는 게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어디 가시려고 그러세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 타시려면 한 층을 더 올라가셔야 해요"
"위로 한 번 더 올라가야 된단다"





© 422737, 출처 Pixabay




무거운 출입문을 연신 밀고 있는 할머니에게 뒤에 서 있던 다른 할머니가 내 말을 전했다. 그런데도 문 앞에 서 있는 할머니는 나름의 확고한 소신(?)이 있으셨는지 열리지 않는 철문을 계속 밀려고 했다. 


"한 층 더 올라가면 엘리베이터가 있단다"
"응?"
"저 아가씨가 올라가라고 그러네"

계속해서 문으로 열려고 하면 다시 한번 더 얘기하려고 옆에 서 있다가, 문 앞에 있던 할머니가 돌아서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오시는 걸 보고 나는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다 올라오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두 할머니는 난간을 꼭 붙잡고 올라오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아이고, 고마워요"

두 분이 내리고 눈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타고 가시라고 알려드리고 상영관을 향했다.  





© thmsr, 출처 Unsplash




상영관을 향하며 문득 한 할머니의 말이 잔잔한 파문을 일게 했다. 


"저 아가씨가 올라가라고 하네"

내가 3, 40대만 되었어도 어쩌면 그 할머니의 터무니 없는 말에도 어깨를 들썩거렸을지 모른다. 아무리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렸어도 환갑인 나를 아가씨로 부르는 건 내가 젊어 보였다기보다는, 그 할머니의 시각적 착오가 부른 판단의 오류가 분명했다. 

젊었을 때는 퇴근하고 돌아와 비번인 남편에게 "오늘 뭐 했어?" 하고 물으면 "하루 종일 당신 생각하고 있었지"라고 하는 남편의 대답이 새빨간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대놓고 콧구멍이 벌렁거리곤 했다. 뻔한 거짓말에도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때로는 가벼운 그 설렘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거짓말에 속을 만큼 나이가 적지 않다. 아가씨라는 말에도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만큼 내 나이가 많이 무거워졌다. 늙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래서 서글픈 것인지 모르겠다. 설레는 것이 자꾸 줄어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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